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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시인 송경동)
     | 2021·01·15 11:30 | HIT : 213 | VOTE : 97 |
우리들의 이야기
시인 송경동

80년대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노동문학을 2000년대에 찾아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시대의 변화를 얘기하면서 많은 이들이 노동문학을 버렸지만, 삶의 밑바닥을 뒹굴며 뒤늦게 노동문학을 시작한 송경동 시인은 아직도 노동문학의 기치를 부여잡고 있다.

  

1967년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난 송경동은 읍내 장터에서 장사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장터에서 살아가는 조건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했던 송경동에게 문학은 우연한 계기로 다가왔다.

  

“중학교 1학년 때 태어나서 처음일 것 같은 칭찬을 받아봤어요. 미술과 문학을 좋아하시던 여선생님이었는데... 하루는 백일장 숙제를 내줬어요. 아무 생각 없이 시를 써갔죠. ‘봄비’라는 시였어요. 지금도 기억나요.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계속 칭찬을 하시는 거예요. 잘 한다고... 그때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하는 거를 처음 느꼈던 거 같애요. 시라는 걸, 문학이라는 걸, 알았나요? 그저 그런 존중이 좋았나 봐요. 그래서 자꾸 ‘나도 그건 잘 할 수 있는가 보다’ 하고 관심을 가지고, 문학책을 읽게 되었어요. 마침 그 선생님이 학교 도서관 운영하시는 선생님이셨는데, 좋게 보셨는가 보죠, 도서관 사서 시켜주셔서 이런 저런 책들 더 읽게 되었죠.

제가 살던 오일장터의 북적거리고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는 공간하고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어요. 그러면서 더 문학을 좋아하게 되고, 마음속에 계속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있는가 보다’하다보니까 자기 마취처럼 ‘그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남았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공부를 해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그때부터 송경동의 삶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힘들었던 건 문화적 차이였어요. 도회지라는 곳을 처음 나와 본 거잖아요. 그 당시만 해도 시골 읍내하고 광주시 풍경은 전혀 틀렸어요. 내가 살던 읍내 장터의 늘 질척거리던 진창길, 악다구니를 쓰면서 사는 사람들, 장터 둘레로 술 팔고 몸 파는 집들이 즐비했어요. 저녁마다 호객행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 곳이었죠. 거기다 어떤 문화적 출구도 찾지 못한 아버지의 잦은 도박과 가정불화로 저희 집안 자체도 늘 어두웠죠. 당연히 제 영혼도 꽤 습지고 어두웠던 거 같아요.

그랬는데 도시에 가니까 모든 게 반듯반듯하고, 깨끗하게 보였어요. 제일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멋진 통유리에 상품들이 전시돼 있는 쇼윈도였죠. 이런 것들이 자꾸 어두운 내 모습을 역으로 비추는 거 같았어요. 그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 영혼이 지저분한 거 같은 그런 충격을 많이 받았던 거 같아요.

그런 나를 숨기고 싶은 마음이 위악적인 표현으로 드러난 거 같아요. 오히려 강한 척했던 건데, 진짜 강한 게 어떤 것인지를 모를 때니 삐뚤어진 모습으로 드러났죠. 자연스럽게 밝은 태양 아래보다 도시의 밤 뒷골목이 좋고, 반듯하고 정상적이고 모범생 같은 친구들보다는, 뭔가 어긋나 있고 비뚤어져 있는 친구들이 저에게 어울리는 거 같고 편하고 했어요.

‘문예반을 하고 싶어 했던 나’와 ‘문제아로 낙인 찍혀서 껄렁거리고 다는 나’ 사이의 극과 극에서 왔다 갔다 했죠.”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문예반 활동도 했지만,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력고사까지 치르고 나서 대학에 원서지원까지 마친 상태에서 급기야 사고를 치면서 구속이 됐다. 유전무죄 유전무죄라고 변호사라도 사주었다면 짧게 살고 나왔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 장사를 하던 집안도 풍지박산이 나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변호사 없이 재판이 진행된 결과 소년원에서 2년여를 살게 된다.

87년 출소 후 마음을 정리하고 새롭게 살아가려고 했지만, 전과자라는 사회적 낙인과 집안의 몰락 등은 20대 초반의 송경동을 다시 자포자기로 몰아갔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삐끼집과 빠징꼬 등을 거치며 전형적인 도시 뒷골목 생활을 맛보게 되었다.

  

“저는 인생을 책이나, 친구나, 선배나, 운동으로부터 배운 거보다 그 바닥에서 살면서 몸으로 배운 거 같애요. 특히, 소년원에서 그랬어요. 거기 들어온 친구들은 좋은 집안인데도 들어온 친구들도 간혹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가정 결손 등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었거든요. 16~17살 이런 애들이 전과가 3범이에요. 다 몇 천원 몇 만원 훔친 죄들이었어요. 겨울이면 먹고 살기가 힘드니 일을 저질러 스스로 들어오는 얘들도 있었어요. 감옥은 그래도 밥 주고 이불 주니까. 서울 와서도 뒷골목에 정상적이고 편안하고 그런 사람들이 오겠어요? 삶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가 열어주는 길은 그런 길 밖에 없는 거잖아요? 자연스럽게 삶을 허비하고 탕진하는 쪽으로 빠지게 되죠. 실상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거죠.

그런 삶들을 쭉 보면서 저도 모르게 계급의식이라는 것이 싹텄죠. 나중에 계급에 대해서 다시 찾아 읽게 되었지만, 계급이 갖는 소외와 폭력이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느끼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그게 제 삶이기도 했으니까요. 전형화, 유형화 이런 말 안 배워도 그냥 정리가 되요. 자연스럽게 사회구조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갖게 되었죠.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기는 힘들었어요. 그 삶의 바닥에서 배우는 것들이 소중한 것들이긴 했지만, 그곳에서 계속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일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이제 나는 자학과 위악의 거짓된 수렁 속에서 나를 구하고 싶었어요. 흔히들 그런 비천한 삶의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욕하지만, 함부로 얘기하면 안 돼요. 누구나 그런 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그렇게 살고 싶겠어요? 방법과 계기가 없는 거죠.”

  

뒷골목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친하게 지내던 빠찡꼬 손님 중 한 사람이 고전무용을 권유하게 된다. 다른 삶을 찾고 싶었던 송경동은 뒷골목 생활을 정리하고, 낮에는 불교책들을 펴내는 인쇄소나 팬시제품 공장 등에서 일을 하면서 무용연구소에서 고전무용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년 만에 그만두고 가족이 있는 순천으로 내려와 목수 조공 일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처음엔 목수 대모도(조공) 일이었다. 아파트 공사장 일이었는데 늘 체력의 한계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악착같이 일해 금세 새끼목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래가 잘 보이지 않던 중 큰 사고가 있었다. 새벽 6시 차도 다니지 않던 공사 현장까지 오토바이로 자신을 태워다주고 새벽시장으로 나가던 아버지가 자신을 내려주고 가던 길에 4톤 덤프트럭에 깔리고 말았다. 뇌수술을 두 번 받는 큰 사고였다. 무적차량이라 보험 처리도 못 받았다. 이래저래 힘들어 일을 바꿨다. 플랜트배관공이었다. 여천 석유화학단지에서 처음 일을 시작해 광양제철소 건설 현장으로, 열병합발전소 건설 현장 등으로 전국 공단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몇 년 일을 하던 중 서산 삼성종합화학단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내게 되었다. 한밤중 함께 일하던 작업자 부탁으로 면소재지로 나간 길이었다. 시속 100km가 넘게 달리다 술에 취해 인도가 없는 시골 길가 집 사이에서 만취되어 튀어 나온 사람을 치었다. 반대 차선 차 불빛에 눈먼 사이로 언뜻 그림자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치 8주였다. 하지만 끌던 차가 보험 미가입 차량이어서 구속이었다. 3개월여 동안 다시 잡범 징역을 살고 나와 보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간 벌었던 돈은 모두 합의금으로 날라 갔다.

  

“그 당시에는 돈을 벌어보고 싶어서 죽어라고 일했거든요. 보통 한 달에 철야를 1주일 넘게 했어요. 어떤 땐 철야를 연달아 3일씩 하기도 했죠. 철야하면 3대가리하고 해서 2일치 임금을 더 주었죠. 새벽녘에 한 1시간쯤씩 잠깐 베니어합판 위에서 골판지나 석면 덮고 자다 일어나서 일했죠. 암유발 물질이라고 했지만 석면이라도 있으면 따뜻해서 좋았어요. 젊으니까... 잔업은 예사였고요. 그 젊은 땐데도 예사로 코피가 터져요. 자고 일어나면 손아귀가 굳어 한참을 주물러야 손이 펴졌죠. 겨울엔 한기가 들어 내복을 세벌씩 껴입은 위에 솜바지 입고 일했고요.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도 용접불똥 때문에 완전무장하고 일해야 했죠. 용접불똥이 자주 또르르 굴러 목이 긴 안전화 속으로 들어올 때가 제일 열 받죠. 살을 김밥처럼 말아 가는데 신발 벗을 틈이 없어요. 미친놈처럼 날뛰죠. 정말 무섭게 일을 했어요.

그렇게 몇 년을 해서 쫓았던 게 돈이라는 건데... 나중에 보니까 하루아침에 날라 가는데, 그렇게 날라 가면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남겨주더라고요. 나는 저를 쫓아서 열심히 살았는데 매정하더군요. 그러다보니까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그 새벽부터 날밤을 새면서 무엇을 했지?’ ‘그 삶은 뭐지?’ 이런 회의감이 들더군요. 당시 아직 어린 마음이었지만, 다시는 돈을 쫓아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돈이라는 건 쫓아서 살 필요가 없는 거구나. 돈은 아무 것도 나에게 남겨주질 않는 허상 같은 거구나.’ ‘다른 삶을 찾자’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서 부렸던 위악처럼, 돈도 내 본모습을 찾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때 버렸어요. 자본에 대한 꿈은...”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면서도 문학에 대한 욕구는 늘 따라 다녔다. 가끔 끄적여 보기도 했다. 그간 살아오며 보았던 삶의 비참과 억울함을 써보고 싶었다. 동정 받아야 될 사람들과 삶으로가 아니라 해방되고 싶어 하는, 해방되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경험하게 된 삶들이었지만 자신의 삶이기도 해서 깊은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건 휴머니즘도 무엇도 아니었다. 자기 삶의 해방과 직결된 절대절명의 일이기도 했다.

91년 한국문학대학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과감하게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곳에서 2년여 동안 김남주, 정희성, 이시영 등 참여문학 계열의 사람들을 만나 본격적으로 학습하며 문학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밑바닥 삶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송경동에게 그곳 교육은 뭔가 이질감을 안겨 주었다. 부족함을 느끼던 중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하던 선배를 만나서 함께 하게 되었다. 1992년이었다.

  

“구로노동자문학회 간다고 했을 때 선생님들께서 반대했죠. 이제 와 그곳을 왜 가냐구요. 구 사회주의권 몰락 후 활동가입네 했던 이들이 다들 나오던 때였죠.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별로 주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운동 바깥에서 현장 생활을 하며 금세 사회가 바뀔 것처럼 떠들던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죠. 제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무슨 다른 정권이 들어서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함께 일해야 했던 그 사람들의 삶이 밝고 환하게 펴지는 거였어요. 그게 오지 않는 이상 포기해야 할 까닭이 없었죠.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고요.

이미 서울로 올라오기로 했을 때 나는 어떤 글을 쓸 것인가는 거의 정리가 되어 있었어요. 내 삶을 쓰는 거였는데, 내 삶은 소년수 감옥과 도회지 뒷골목과 노동 현장에 버려져서 천대받는 삶들 속에 있었죠. 나를 쓰는 것은 그들을 쓰는 것이었어요. 삶은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정의를 위해 분노해야 한다, 노동자가 세상을 만든다, 민중파시즘이니, 연대가 필요하다, 뭐 이런 얘기 어렵게 쓰지 않아도 다들 그렇게 살다보면 느끼게 되어 있어요. 사실 그렇게 정리가 돼 있으니까 따로 흔들리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죠.

와서 보니까 딱 맞는 건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나와 비슷하게 살아왔던 사람들, 아니면 그런 삶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까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고 정리를 했죠.”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지만 그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힘겨운 밑바닥이었다.

  

“서울 와서도 저는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몇 년 동안 일을 계속 했었어요. 가방 하나만 딱 들고 혈혈단신으로 올라온 거였죠. 다 까먹었으니까 돈도 없었고... 정말 차비만 3만원 들고 올라왔어요. 와서 친구 자취방에 딱 3일 있다가 함바(기숙사)가 있는 공사장으로 떠돌았죠.

플랜트 배관일은 써먹을 곳이 별로 없었지만 목수일, 설비일, 용접일은 쓸만했어요. 돈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형편에 따라 닥치는데로 했죠. 곰빵, 질통, 방통, 공구리, 닥트 등등등...

지하철 공사장 일을 제일 많이 했죠. 제일 힘들고 위험한 일이긴 했지만 거기 가면 콘테이너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기거할 데가 있었으니까요. 가끔 지하철 타고 지나다 보면 생각나죠. ‘아, 여기서 김 씨가 떨어져 죽었지’ ‘아, 여기서 정 씨가 감전으로 죽었지’ ‘아, 여기서 발파하다 세 명이 죽었지’ ‘아, 여기서 기름호스가 터져 불바다가 됐어지’ 하는 생각들요. 지하철은 500m 파들어 가는데 한 명씩 죽을 것을 계산하며 하는 공사였죠. 그렇게 일하며 함바(공사장 식당)에서 밥 먹으며 몇 년을 떠돌며 문학공부하고 활동했어요.

서울 생활 근 3년이 지나서야 가리봉동에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8만원짜리 방을 얻을 수 있었죠. 그런 식으로 서울 생활을 하니까 사실은 공부하기가 쉽지는 않았죠. 거의 대개가 한 방에 너댓 명씩 생활하는 곳이었죠. 다들 잠들면 방해하지 않으려고 촛불 켜 두고 책 봤어요. 운동하는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이론적으로도 딸리면 안 되었죠. 늦은 만큼 더 악착같이 공부했어요.”

  

송경동이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시작하던 92년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다수의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난 시기였다.

  

“나쁜 건 아니었지만 운동을 위한 운동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나는 내 삶의 해방을 위한 운동인데.... 사람들은 담론 속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까 ‘세계 사회주의가 패망을 해서 이제는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 이런 고민을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도 여기저기 공사장에서 가방 하나 들고 다니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해방되지 않은 정서와 삶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눈앞에 보이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모습들 속에서 연대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니 좀 다른 거 같더라고요. 사람들은 자신이 책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관적 지향이 이 사회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게 꿈인 거죠. 그런데 그러다보면 인간이 빠져 있을 수 있어요. 모든 게 대상화 되죠... ‘그게 안 될 거 같다’ 아니면 ‘너무 후에 올 것 같다’ 그러면 다른 판단들을 하게 되죠.

와서 보니까 구로노동자문학회도 그런 혼란에 들어가 있었어요. 구로노동자문학회는 1988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때까지 지키고 있었던 초창기 멤버들이 대부분 정리하고 나가요. 인간적 관계는 조금씩 남겨 놓지만 활동의 중심을 옮기죠. 나중엔 우리한테 ‘여기 끝난 거 아니냐? 비전이 없지 않냐?’ 오히려 그래요.

맨 처음에 무너졌던 건 학습이었어요. 과거에 믿었던 경전들이 안 맞는 거 같잖아요. 소용없어 보이고... 그러니 정확한 방향이 없어진 거죠. 관성적인 활동들만 반복이 되요. 신명도 안 나고, 술들도 많이 먹게 되고, ‘얻은 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문학이다’라는 유명한 훼절의 말처럼 운동보다는 문학이 우위에 서게 되는데 그게 충족 안 되면 또 떠나가고.... 하지만 저는 단체는 무너져도 그 지향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레 고수파가 되었죠. 그 후 90년대 내내 깃발 안 내린다고 갖은 얘기를 다 들었던 것 같아요.”

  

구로노동자문학회는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창작반(시, 소설, 산문), 사회과학 학습모임, 회보 제작, 시낭송단 모임(쟁의현장에서 시낭송), 현장 노조 편집 지원, 노동자문학의 밤, 책 대여사업, 노동자문학교실, 투쟁 현장과 공동창작, 현장 시화전, 지역민주단체협의회 활동, 노동조합사 정리 등 초기 문학회의 활동은 현장과 긴밀히 결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활동가들이 떠나가고, 현장 활동도 점차 위축되면서 문학회 활동도 위축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문학회 활동 하는 과정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안 되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중간에 회원 조직의 한계를 느꼈던 거 같애요. 써클화 되는 운동에 대해서도 고민이 됐고... 저는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처음 설립했던 취지의 활동을 밀고 나가는 게 맞다는 고민을 했었으니까요. 나중에는 있는 회원들끼리의 친목모임처럼 자꾸 가게 되더라고요. 다른 사업들은 축소되고 자르고... ‘그런 것들을 넘어서 어떻게 가야 되나?’ 그래서 ‘전문적으로 노동자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자문학교육센터 이런 걸로 갈 필요가 있지 않나?’ 이런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잘 소통이 안 되더라고요. 아직은 동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회원들 모이고, 맨날 즐겁고 그러니까 좋잖아요.

전형적인 활동들이 안 만들어지다 보니 활동가층도 안 만들어져요. 모두가 조금씩 밖에 책임이 안 돌아가는 조건이다 보니 그랬죠.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을 더 투여할 곳들을 찾게 되요. 구심력은 자꾸 줄어들고 원심력만 생겨나가는 것을 보았죠.”

  

구로노동자문학회 뿐 아니라 구로지역 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 속에 빠져 새로운 활로를 고민하던 가운데 몇 명의 사람들이 만나서 새로운 사업에 의기투합을 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발간됐던 지역노동자 대상 소책자였던 ‘단결의 길’을 복각해야겠다는 고민을 하던 송경동과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이인휘, 김종수열사추모사업회 홍기열, 서울진보청년회 정종권이 만나 잡지 사업에 대한 의견을 나누게 된다. 여러 논의 끝에 구로지역 중심이 아니라 전국적인 노동자생활문화 잡지를 만들기로 97년 6월 결의하고, 98년 1월 ‘삶이 보이는 창’을 창간하게 된다.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죠.

첫째가 선긋기나 편 가르기 하지 않는다. 그것도 보니까 운동의 폐해 중 하나인 거 같다. 주적이 있는 어떤 전선을 향해서 가는 운동과 활동들을 개발하는 게 우리의 주가 돼야 하는데, 닫힌 공간에 모여 앉아 권력투쟁이나 노선투쟁이나 무슨 100% 순도 경쟁하듯이 동지 비판에나 열 올리는 건 아닌 것 같았죠. 오히려 연대의 중요성을 느껴가는 운동이 되었으면 했어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떠나가게 하는 운동문화를 넘어서고 싶었죠.

두 번째로는 사업을 통해서 생기는 모든 유·무형의 성과는 민중운동 발전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된다. 이렇게 못 박았어요. 이런 사업을 하다보면, 과거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다 개인 사유화 돼 버리듯, 욕심들이 생겨나거나 왜곡된 방향으로 흐를 수가 있잖아요. ‘과정이 좋았다 나빴다’를 떠나서 사람들의 삶이란 간교한 것이라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약속하자 했죠. 누굴 떠나서 제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어요.

세 번째로는 실무적으로 일을 하는 일꾼들은 어떤 사리사욕도 갖지 않는다였죠. 상층의 몇 사람들 때문에 운동이 망가지는 경우 많잖아요. 나중에는 자기 정체성 발현이나 자기 욕망을 위해서 운동의 성과를 사유화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 훼손해 버리죠. 특히 일했던 사람들이... 그래서 일반인들도 운동을 잘 안 믿게 되었잖아요. 제들 또 나중엔 제 욕심들 챙길 인간들이라고... 김문수 등등... 구로동에도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서 운동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죠. 우리는 최소한 그러지는 말자는 의미였어요.

그것도 어찌 보면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의 운동에 대한 패배감이 담겨 있었던 거죠.”

  

‘관념화된 내용이 아니라 평범한 삶에서 배우자’는 고민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글쓰기 운동’을 시도했던 ‘삶이 보이는 창’은 초기 몇 년간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처음 만들 때 쌈짓돈이 300만 원정도 있었어요.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동지들이 노동법 교실하려고 만들었던 300만원을 꿔온 거예요. 딱 그거였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몇 년 동안 고민했던 게 한 호 만들 때 300~400만원 드는데 어디서 구하지 하는 일이었어요.

주변에서도 ‘저런 책이 될 거냐?’ 그러고... 무엇보다 80년대 운동의 패배감을 넘어서는 게 제일 컸어요. 말하자면 현실 사회주의권의 패배를 넘어서는 일이었죠. ‘그런 책이 되겠어? 만들다 상처만 남는 거 아니야?’ ‘누가 그런 책을 봐죠?’ 이런 패배감들을 넘어서서 ‘그래도 우리 노동자들이 이 책을 봐줄 것이고, 살아남을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는 지점을 만들어야 했죠. 이것은 ‘삶이 보이는 창’이 살아남을 수 있냐 없냐를 떠나 중요했죠. 창과 같은 노동자잡지가 대중들의 힘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었죠. 그럼 또 다른 모색들과 실험들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꿈을 꾸는 것... 그게 창의 꿈이었어요. 우리만 살아남고 시장을 독점했으면 이런 꿈이 아니었던 거죠.

몇 년 지나니까 조금씩 변하더라고요. ‘그게 좀 되네. 좀 도와줄 일 없어?’ 이렇게 주변사람들이 변하고... 나중에 또 몇 년 지나니까 ‘야, 정말 되네’ ‘고생하네’ 그 얘기가 나오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운동에 대해서도 마음을 조금씩 열더군요. 창이 주로 만나고자 했던 사람들은 선진활동가들이 아니었어요. 운동을 하다 상처받고 떠났거나, 한 번도 경험 못해 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이 연대전선 안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운동이었죠.

출판구조는 유혹이 굉장히 많아요. 자본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돈이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니까... 중간에도 유혹이 들어오곤 했지요. 왜냐하면 힘드니까... ‘계속 이렇게 힘들게 할 거냐.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해 보면 어떠냐?’ 하곤 했죠. 그런 이야기는 내부에서도 나오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정말 우호적인 마음에서 우러나 나오기도 해요. 하지만 경계해야 하죠. 따뜻하고 안타까운 마음들은 알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죠. 오히려 자신의 존재기반을 폄하하거나 헐뜯게 되요. 처음과 다르게 ‘우리 운동은 안 돼!’ 이런 이야기를 은연중에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죠.

그래도 ‘삶이 보이는 창’은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면서 잘 걸어왔다고 봐요.”

  

‘삶이 보이는 창’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서 본격적인 노동문학의 하나로 르포문학의 부활을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소설은 워낙 상품화가 많이 됐고... 시 같은 경우는 현실운동이 긴박하게 돌아가거나 어떤 꿈들이 보이거나 이럴 때 타오르는 경향이 있거든요. 일상적 시기에는 시들이 이런 활동선으로 안 내려오죠. ‘이런 시기에 시도 소설도 자기 역할을 못한다면, 어떤 것을 통해서 다른 얘기가 생산되도록 할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것도 사실은 90년대 중반부터 했던 거죠.

그래서 르포운동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 르포 정신이라는 화두를 다시 한 번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시인 소설가라는 이름에 매여 버리고, 그 형식에 갇혀 버린 이런 운동을 넘어서 갈 수 있는 게 르포운동인 거 같다고 생각했죠. 르포운동의 속성상 현장에 좀 더 긴밀히 붙어야 되고... 붙어서도 기사처럼 겉으로 일어나는 일의 기록이 아니라 심층을 파고 들어가야 되고... 그러다보면 글과 삶이 다시 하나로 가는 문학인들의 전형이 세워지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몇 년 짬을 보다 계기를 만들어 시작했어요. 물론 처음엔 거의 대부분 관심들이 없었죠. 그래도 몇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자기 운동으로 만들어 가보려고 노력하는 속에서 결실들이 하나 둘씩 만들어졌어요. 느낌이 좋으니까 마산 창원에서도 르포문학교실을 만들게 되고, 구로노동자문학회도 르포강좌를 대중적으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몇몇 인터넷언론이나 이런 데서도 르포를 받게 되고, 요 근래 와서는 한겨레신문에서도 르포문학상을 제정하더군요.”

  

지역 활동에도 열의를 가지고 참여했던 송경동은 지역운동의 흐름 속에서 많은 아쉬움을 얘기했다.

  

“구로 지역도 처음에는 노동현장 중심의 운동들로 다 짜여졌었죠. 제일 큰 축은 현장에 들어가서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는 외곽에서 지원하는 운동들이었죠. 야학운동이니, 민중교회운동이니, 다양한 문화단체들도 있었고, 청년회 조직들도 있었고, 노동상담센터나 노동자회 조직들이 주변에 있었고, 건강의료 관련한 지원하는 곳들이 있었고... 다양한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소진되었어요.

저희 지역 같은 경우는 96년경에 크게 분화를 했죠. 한 축들이 시민운동류의 지역운동으로 빠지게 되죠. 일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장울타리 안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조 설립 투쟁 외에 지역 내에 코뮌적인 성격의 공간들을 열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대부분 지역운동으로 가는 축들은 ‘계급’을 해체해 나가는 경향이 강했죠. 거기에 ‘시민’이나 ‘대중’이나 ‘주민’을 넣죠. 아예 대체를 해버리려는 욕망에 휘둘려요. 나중엔 ‘국민’이나, 결은 다르지만 ‘환경생태’나 ‘다중’까지 다종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죠.

그 모든 게 과거 운동 논리로 부차화 돼야 되는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잘못된 운동이 갖고 있는 폭력일 테니까요. 하지만 역으로 새로운 영역의 개척에 나서며 계급문제를 부차화 시켜 버리는 흐름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가장 보편적인 문제를 계급의 해방에 두고 지역과 환경생태와 문화와 성의 문제 등 다양한 삶의 공간을 재전유해 나가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는 거죠.

여하튼 굳이 제가 얘기해야 할 것은 아니겠지만, 90년대 들어 주로 지역과 주민 등 생산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 내에서의 민주주의를 위해 나아간 활동들도 잘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역연대운동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민중연대 전선운동이 민주노동당 활동을 보완해주는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어요. 도구가 되어버린 거죠. 민중연대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당원들이고 그러니까 그 안에서도 문제의식들이 무화돼 버리는 거예요. 별 재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것이 자꾸 약화되더니 근래 들어서는 민중연대운동이라는 독자적 위상 자체도 유실돼 버리더라고요. 근래 얘기되는 민주노동당의 몰락 관련해서 정말 반성되어야 할 지점 중 하나일 거예요. 진정한 민중연대전선의 확대와 강화에 대한 고민들과 실천들이 없었던 거죠. 끼리끼리만 모이고, 흔히 이야기되는 전통적인 운동권들만 모이고, 문제 제기하면 오히려 다른 단위들이 문제고...

지역운동은 고민이 많죠. 주민운동까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운동 관련해서는 보이는 일들은 많은데... 여긴 미조직 사업장들이 대다수니까요. 구로공단은 얼마 전에 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도 바뀌었어요. 새롭게 들어선 IT나 기존의 굴뚝 공장, 그리고 주변에 산재한 비정규사업장들과 이주노동자들까지 합치면 공단 중심 노동자가 7만 명 정도로 불어나 있죠. 그런데 민주노총으로 조직돼 있는 사람들은 다 합쳐봐야 500명 이쪽저쪽이에요. 공단 내에서 새로 인원을 뽑는 경우 96%가 비정규직이에요. 저임금이고, 대다수가 불법파견이죠.

이런 곳들을 조직하고 싸움들을 해나가야 되는데 워낙 자원이 충분치 않다 보니까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죠. 3만 명에 이르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조사 사업을 한두 번 해본 거 외에는 이주노동자 사업을 대중운동 차원에서 하지를 못해요. 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뀐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그 공장형 빌딩 속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나 현황조차도 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 고민이 되죠. 80년대 한때 구로동을 노동운동의 메카라고도 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운동 중심이 인천이나 울산 같은 대공장 운동과 공공운동으로 쭉 가는 흐름이 생기면서 여기 조그만 공장 와서 조직 활동 해보려는 사람들도 없어졌죠.

하지만 이제 다시 새롭게 미조직 비정규직노동운동을 축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세워가야 할 때, 구로지역 운동도 스스로 자기 점검을 해보고, 어떤 정리와 계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해요.”

  

90년대 초반 이후 모든 운동이 조금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80년대부터 맥을 이어오던 노동문화운동 역시 위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IMF구제금융 사태는 반성과 분발의 계기였다. 다시 기운을 차리기 위해 노동문화운동단체대표자회의(98년)와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2000년)가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한국사회에 노동과 계급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전체 사회와 소통하는 운동이 됐었잖아요. 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대중적인 노동문화운동이 새롭게 시작되었죠. 과거 민족문화운동, 민중문화운동의 정신을 이으면서도 다른 운동이었죠. 분단 이후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나타난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자대중들과 함께 하는 노동자문화운동이었어요. 처음으로 노동문화운동이라는 걸 실험을 해본 거죠. 노동자문학회만 해도 지역에 십 수 군데가 활동할 정도였으니까요. 내용도 깊었고 변혁적이었죠.

그런데 이게 언제부턴가 그 변혁성을 잃고 자꾸 노동조합운동에 매몰되어 버렸죠. 저는 굉장히 안타까워요. 어느 순간 노동문화운동도 자기 갱신을 게을리 하고, 스스로는 늘 부정하고 그것과 싸운다고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문예라는 한 부문을 맡는 기능적 역할을 하는 단위로 밖에 자기 꿈을 못 꿔 버린 거죠. 새로운 활동방식이나 표현의 장을 열어주지 못해온 거죠.

그래서 ‘그걸 깨고 넘어보자’ 한 것이 노문센터운동이었던 거예요. 한편 기운을 낸 거죠. 그 당시 초기 회원이 400~500명 정도 됐으니까 관심들도 많았죠. 80년대 노동문화연대운동이 90년대 초반에 다 깨졌었는데 다시 계기를 만든 거예요.

과거와 조직적으로 보면 다른 점은, 과거와 같은 수직적 위계를 가진 연합적 질서, 그러니까 ‘지도와 피지도가 있고 중심과 주변이 있는 피라미드형 질서는 아닌 거 같다’ 해서 ‘네트워크적인 조직 원리로 만들자’는 거였죠. 거기에는 현실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평가도 들어있었어요. 센터의 사무국은 뭔가를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의 자발적 활동을 소통시켜주는 통로 역할만 해야 한다는 식이었어요. 조직 형식에서는 협의회나 연합 등의 형식에서 센터로 간 거고, 모토에서도 과거처럼 사회주의나 노동해방처럼 명시적인 거라기보다는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이런 식이었어요.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죠. 과거에는 공장 계급 조직이 중심이었는데... 그때 문제의식은 ‘국경 없는 자본의 힘이 우리 삶의 전 부분을 상품화하면서 장악해 들어오는 거 아니냐?’ 하면서 ‘공장사회’에 대한 대응 뭐 이런 개념으로 접근했어요. 저는 문제의식은 맞다고 봤어요. ‘삶의 전 전선에서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서 문화 활동을 펼쳐보자’ ‘공장 중심의 계급운동에서 삶의 장으로 지평을 넓혀보자’ 이런 고민도 있었던 거 같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거기에 어울릴만한 활동전형을 못 만들어낸 거죠. 처음에 사업을 시작할 때 주요하게 넣었던 게 ‘정책’이었죠. 정책과 방향이 모호해져 있었던 거예요.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총노선이나 이런 것에서 정리가 안 되니까 ‘그럼 문화운동도 다시 어떻게 나아갈까 정리를 해보자’ 했는데, 하다보니까 잘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계속 좌충우돌하는 거죠. 그 자체가 명확한 활동방향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거였다기보다는 실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조직운영 원리에서 ‘네트워크 방식이 적합하냐? 접합하니 않냐?’ ‘이게 생산성이 있냐? 없냐?’ ‘효율적이냐? 효율적이지 않냐?’ 등등으로 계속 중심적 역할을 바라는 선들이 여전히 있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놔둬라. 회원들이 하는 거지, 여기는 그냥 통로다’ 하면서 서로 정리 안 되고... 실험들은 많이 했지만 정리되는 것은 잘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저는 지금 와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한편 ‘현장을 너무 무시한 게 있다’ 싶어요. 자꾸 현장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결과적으로 노문센터 운동을 주요하게 했던 선들이 노동운동에 남아 있지를 않거든요. 민예총운동으로 간 사람들이 여러 명 있고, 개인적으로 일 찾아서 간 사람들, 시민운동 비슷한 쪽으로 건너간 사람들... 모두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알지만 결과는 전선의 확대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그나마 있던 전선마저 이완되어 버린 형국인 것 같아요. ‘일상의 모든 것들과 싸워라’라는 모토는 좋은데, 알게 모르게 해체주의로 가면서 자꾸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가는 경향들이 생긴 측면도 있는 듯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철저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운 조건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보면 항상 재정문제가 고민스럽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삶이 보이는 창’에서 만들었던 ‘디지털노동문화복지센터’의 ‘신나는 문화학교’ 사업에서 불거졌고, 이후 노문센터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실업극복국민재단하고 같이 하는 사업인데 장기적인 거점이 필요하고, 평범한 삶들 속으로 들어가는 문화예술운동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했죠. 거기에 늘 생계가 어려운 노동문화활동가들의 생계 문제를 고민해 나간다는 게 결부되었고요. 내용은 ‘문화예술인 사회적 일자리 만들기 운동’ 형식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삼성증권 후원을 걸어 줘야 되는 거예요.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삼성증권한테 후원을 받아 왔으니까.

그래서 저희 안에서 부딪혔죠. ‘사업내용 자체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고, 어차피 우리 힘이나 조건이 그러니까 실업극복국민재단하고 같이 하는 거는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사업을 하면서 모든 홍보물에서 삼성증권을 박아주는 식으로 기업이데올로기에 활용당하는 것은 반대다’ 그랬어요. 굉장히 부딪힘이 많이 생겼죠.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끼리 감정까지 상하게 되거든요.

참 딜레마죠. 사실은 실업극복사업이라는 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사업이잖아요. 수많은 비정규직을 배출해 내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런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켜 놓고,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먹는 기업들이 뒤로는 ‘우리가 힘들여서 번 돈을 사회로 환원한다’ 이런 사업인데... 그게 자본의 이데올로기고,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문화 이데올로긴데... ‘그런 거에 문제의식을 갖고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그걸 받아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정당한 문제의식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한쪽에서는 ‘활용하자’고 하고... 돈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노문센터 내부에서도 격렬하게 부딪쳤죠. 이래저래 사업은 잘 안되고 이런 일로 내홍만 겪다가 그 일 이후 얼마 안가 노문센터는 문 닫고 말았죠.”

  

10여 년 이상을 구로지역을 중심으로 노동문화운동을 해왔던 송경동에게도 운동의 위기는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10대부터 정신없이 살았어요. 방황도 많이 했고, 전혀 몰랐던 세계들도 경험하게 되었죠. 스물여덟 되니까 한번 힘들더군요. 단체가 일을 벌이지도 않고, 단체에서 맞았던 역할들도 없고, 그래서 달리 일도 없었죠. 그런 까닭도 있었지만, 제일 힘든 건 내가 그동안 ‘어중간히 발을 붙이면서 활동을 해왔구나’ 하는 반성과 후회가 컸어요. 내 스스로 나를 볼 때 기회주의적인 모습이 느껴져서 굉장히 아프고 힘들었어요.

‘이 고비를 어떻게 넘을 거냐?’ 하는 고민을 했죠. ‘잘못하고 열심히 하지 못했던 까닭에 내가 이렇게 아픈 거라면 아예 몸을 완전히 싣고 한 번 해보자. 그래야 거기서 빠져 죽든 살아남든 후회는 없지 않겠나’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를 보지 않고... ‘이거 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되도 좋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그렇게 생각을 했죠.

마침 그 시기에 ‘삶이 보이는 창’ 일도 사람들이 꾸려져서 그래서 볼 것 없이 ‘삶이 보이는 창’ 만드는 데에 완전히 올인 했어요. 더불어 노동자문학운동도 후회남지 않게 해보자는 생각에 다시 역할들 맡으며 최선을 다해봤죠. ‘전국노동자문학회대표자회의’였던 조직 위상을 ‘전국노동자문학연대’로 높여도 보았죠. 대중생활문예지인 ‘삶이 보이는 창’과 다른 역할로 본격 노동문학잡지를 표방하는 ‘계간 노동자문예 삶글’도 펴내고, 문학회 회원들끼리의 친목행사로 다운된 ‘전국노동자문학회 대동제’를 ‘전국노동자 여름문학캠프’로 바꿔 일반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대중행사로 가져갔죠.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다고 봐요. 한 때는 돈 넣고 다니는 호주머니가 5~6군데가 다 틀리더라고요. 여기는 지역 재정, 여긴 구노문, 여긴 전노문, 여긴 노동문화운동, 여긴 삶이 보이는 창 식 이었죠. 일도 시간으로 나눠서 했어요. 출근하면 몇 시간은 창일, 몇 시간은 구노문 일, 몇 시간은 지역일 하는 식 이었죠. 안 그러면 헷갈리니까...

그렇게 쭉 몇 년을 산거죠. 30대 중반 쯤 되니까 또 위기가 왔어요. 몇 년 쭉 하다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구력이 붙고, 관계도 생기고, 뭔가 좀 보이기도 하고, 이리 이리 하면 금방 일도 좀 되고, 사람들도 좋아해주고...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어느 순간 내가 기계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삶이 씁쓸해져요. 겉으로는 막 바쁜 것 같지만, 진실성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이런 게 빠진 거 같고, 모든 것을 볼 때 ‘저건 저렇게 하다가 저렇게 될 거야’ 이렇게 결정론적이게 되고, 그러면서 운동에 대해서도 고민이 달라지는 거 같고... 그 나이가 되니까 사적인 것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운동해 왔는데, 나는...’ 그러면서 어느 순간 보니까 욕심이 생기고... 그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던 거 같은데...

그래서 좀 힘들었어요. 방황을 꽤 했죠. 그런데 누구에게 보이게 방황은 못 했어요. 내적으로만 방황을 겪게 됐어요. 그 전과 다르게 술도 막 먹게 되고, 가끔씩 다른 여자 생각도 나고, 뭔 일 할 때 나를 배려해주지 않으면 괜히 서운하고... 이런 것들이 생기니까 ‘내가 썩어가는 거 아냐? 그러지는 말자’ 그랬는데 하면서 쓸쓸해지더군요.

그게 오래 못 가더라고요. 계속 일은 있지... 짬짬이 혼자 망가지지... 나중에 서른다섯 때 와장창 무너지더라고요. 도저히 일상을 견딜 수가 없고, 나를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딱 보따리 싸들고 ‘미안한데, 나 좀 쉬어야겠다’ 그러고 도망갔어요. 하루 아침에 머리 박박 밀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그렇게 혼자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며 3개월 정도 쉬었어요. 그런데 그 과정이 더 아팠어요. 그건 쉬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KO된 거였죠. 일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은 못하겠고요. 사실은 게으름과 안일함, 그리고 다시 고개를 쳐든 사적 욕망들, 대충주의 이런 게 절 무너뜨린 거였죠. 그러다보니까 가서도 힘들더라고요. 어찌됐든 그 시간 속에서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죠.

그러면서 다시 조금 정리가 되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10대부터 가졌던 문제의식이나 방향이 틀린 거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거기로 가는 거다. 오히려 부족한 나를 돌아보면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더 적극적으로 내용 있게 해봐야겠다. 그래서 다시 복귀해서 일을 했어요. 이젠 경험을 위한 일이나 규모를 위한 일이 아닌 정말 내용을 가질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공개적인 투쟁시도 조금씩 쓰기 시작했죠. 그 전에는 집회나 이런 데 있으면 ‘머릿수 하나로만 참여해도 좋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이왕 이렇게 살기로 한 바에 뭐든 보탬이 될 수 있는 걸 하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주로 마당을 만들고 지키고 치우는 일들이 많았죠. 그게 즐겁기도 했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당을 만들어놔도 사람들이 잘 안와요. 와서도 얄밉게 필요한 만큼만 놀다가죠. 그래서 그전과는 다르게 꾸준히 해왔던 마당지기 역할을 조금 줄이고, 줄인 부분만큼 개인적인 활동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멍석에서 화살촉으로 역할을 조금 할애한 거죠. 제가 전위적인 화살촉 역할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되는 만큼이라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 일환으로 늦게야 마흔이 다 되서 개인시집 ‘꿀잠’도 묶어냈죠.

활동도 지역을 떠나 필요한 어떤 거든 제기하고 참여하게 되었어요. 국보싸움에 결합하고, 대추리 싸움에 결합하고, 비정규직투쟁 관련 문화 사업들을 기획하고, 농민투쟁 지원을 위한 문화 사업들도 여러 건 하게 되고, 전체 문화운동 관련한 일에도 함께 하게 되었죠.”

  

40대에 접어든 송경동은 ‘이제 글을 쓰고 싶다’고 얘기한다.

  

“처음 ‘글을 업으로 삼아 보겠다’ 하면서 멍청하니 전략을 어떻게 세웠냐 하면... 30대까지는 몸으로 사람들 속에서 살아보고, 운동과 함께 살아보고, 마흔이 되면 글을 써보자. 이랬어요. ‘그러면 내가 거짓말은 안 쓰지 않겠냐?’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 때가 온 거예요. 내가 생각해왔던 거, 어릴 적 삶이나 성장기에 느꼈던 고통이 됐든, 바닥 인생들과 그런 정서에 대한 얘기든, 내가 운동과 함께 하면서 느꼈던 삶의 이야기든... 그런 것들을 이젠 부족하더라도 써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어요. 그게 또 문학운동을 하는 제 역할 중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래서 작년까지 해서 맡고 있던 역할들도 대부분 다시 놓았어요. 삶이 보이는 창 대표일은 재작년에 놓았고요. 작년까지 맡고 있던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한미FTA저지 문화예술공대위 집행위원장 등도 정리했어요. 이제 되든 안 되든 시인 송경동이 되 봐야 해요. 저를 위해서도 그렇고, 제가 지향해 왔던 운동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에요.

이제 마흔 둘이죠. 그간 어찌됐든 문학예술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 언론·출판운동 등 조금씩 다 해왔던 거 같애요. 그런 걸 쭉 해왔는데 ‘이제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정도의 얘기를 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방향에서는 고민이 없어요. 걸어 왔던 길을 더 열심히 더 철저히 가고 싶은 마음뿐이니까요. ‘이제 죽을 때까지 이 길 가겠네’ 하는 생각은 해요.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더 잘해야겠죠.

마음은 그런데, 내 구체적인 삶이 거기에 합당하게 따라줄 수 있겠나... 그런 부분에서는 나도 많이 속화된 부분도 있지 않나... 청년기처럼 용기가 없어진 것도 있지 않나... 웬만하면 대충 인정하고 싶고... 나도 대충 이 정도만 발 담그고 싶고... 내 자리도 잡고 싶고... 나도 이 사회에 살다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속화되지만은 말자 이런 생각 정도를 하죠. 내 마음에 100% 순도의 뜨거운 열정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그게 없더라도 몸이라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어요. 전 아직도 마음과 생각보다는 몸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닥다리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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