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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허영구


노동운동가. 현재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 <최명아동지추모사업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펴낸 책으로 『그래, 우린 노동자요』, 『진보정치를 위하여』, 『노동의 불복종』 등이 있습니다.


세상사 시끄러워도 씨앗을 뿌리자!
 칼럼니스트  | 2010·03·23 22:17 | HIT : 4,023 | VOTE : 646 |
세상사 시끄러워도 씨앗을 뿌리자!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4월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황사와 함께 눈이 내린다. 최근의 폭설은 대부분 기상관측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나무들이 뚝뚝 부러진 채 산 곳곳에 널 부러져 있다. 겨울이면 앙상한 활엽수보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고고하지만 포근한 눈을 이길 수없는 게 자연의 이치다. 지구 전체가 지진, 폭설, 폭우,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무제한적 자원낭비와 환경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주의 경제성장이 가져온 기상이변이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들려오면서 그 꽃송이 위에 차가운 눈이 내렸지만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 봄은 왔지만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은 보란 듯이 땅에서 나뭇가지에서 새싹을 내보인다.

-봄나물이 지천으로 널렸던 동네 아파트 단지에 빼앗기고

내가 사는 경기북부 남양주시 호평동에도 봄이 찾아왔다. 24년째 살고 있으니 토박이라 할 만 하다. 당시만 해도 천마산이 바라보이는 들판에 조그만 동네가 있고 5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전부였다. 창문을 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름답고 내려다보면 들의 논밭이 싱그러웠다. 여름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계곡에서 가재도 잡아오고 정월 대보름이면 들판에서 쥐불놀이한 탓에 콧구멍이 새카만 채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른 봄이면 들판에 나가 냉이, 쑥, 미나리 등을 해 와서 입맛을 돋우는 저녁 반찬으로 해 먹고 양이 많아 직장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근처 야산에는 산나물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이웃 간에도 서로 나눠먹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논과 밭은 어느새 사라졌다. 천마산과 백봉산 허리를 잘라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겼고 동네는 아파트와 상가가 생겼다. 창문을 열면 고층아파트가 산을 가린다. 선풍기 없이 여름을 보냈던 집이 바람이 안 통해 더워졌다. 집 앞에 교통신호들이 설치되고 차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맑은 날에도 총총한 하늘의 별을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 쑥이나 냉이를 캐려고 해도 차를 타고 북한강 쪽으로 나가야 한다. 남양주시는 세계유기농대회를 유치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4대강 파헤치기 정책에 밀려 북한강변의 유기농 단지도 빼앗길 지경에 몰렸다. 그러니 냉이나 쑥 캐는 것조차도 어려워질 것이다.

- 열 평 채소밭에서 느끼는 수확의 기쁨

지난해 동네 백봉산 끝자락 목장 터 밭 열 평을 8만원에 임대했다. 무, 배추, 쑥갓, 상추, 근대는 씨앗을 사고, 호박 다섯 포기, 고추 스무 포기, 가지 다섯 포기, 치커리 스무 포기, 케일 다섯 포기는 모종으로 샀다. 밭주인이 경운기로 갈아 놓은 탓에 간단한 농기구로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호박은 경사진 밭둑에 심었다. 다섯 살짜리 막내는 뛰어다니며 놀았다. 곡식이나 채소는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다. 며칠만 거르면 채소 사이로 잡초(풀)가 우거진다. 한 달 쯤 지나자 수확의 기쁨이 찾아왔다. 엇가리 무와 배추, 상추는 어릴 때부터 솎아내기를 하다보면 여러 차례 수확할 수 있다. 한 달이나 한 달 반이면 다시 씨앗을 뿌리니 일 년에 서너 번 수확할 수 있다. 김치를 담가먹을 수도 있고 나물이나 국거리로 먹을 수도 있다.

땅에게는 미안하다. 착취하는 거니까. 자본이 노동자 착취하는 거 반대하는 운동을 업으로 하는 처지에서 보면 땅도 돌아가면서 그냥 잡초가 우거지거나 게으르게 유휴지(안식년)로 둬야 한다. 그런데 열 평에 한 가정의 일 년 채소를 모두 공급해야 한다는 욕심에 땅을 괴롭힌다. 일종의 집약적 약탈농법이다. 태평농법처럼 잡초 속에 씨앗을 뿌려 더불어 수확할 수 있는 만큼만 거두어 먹고 살면 될 텐데 욕심 때문이다. 가지나 고추는 2, 3일만에 가 보면 주렁주렁 달린다. 정말 신기할 정도다. 가지 5포기로도 한 식구가 먹기에 벅찰 정도다.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주대만 세워주면 그냥 쭉쭉 자란다. 가지도 위에서만 따다가는 한두 개는 빠트리기 일쑤다.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가지나무 속을 쳐다보면 수확시기를 넘긴 큰 가지가 달려 있다.

- 태평농법은 아닐지라도 자연농법으로

고추 스무 포기는 김장하기에는 적은 양이지만 그냥 풋고추로 먹기에는 너무 많아 이웃과 나눠먹었다. 치커리는 스무 포기나 사서 심었더니 몇 번 잎을 따다가 쌈을 사 먹거나 생즙으로 갈아먹었는데 너무 많아 먹을 수 없었다. 나중에 나무처럼 커져서 뽑아서 버려야 했다. 치커리는 잎을 따다 먹고 나면 금방 잎이 돋아나지만 몇 차례 지나고 나면 벌레가 먹고 진드기가 끼여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그래도 열 평 농사꾼의 무 농약 철학을 실천하느라 그냥 버릴 수밖에 없다. 시장에 나오는 반들반들한 채소는 농약 안치고는 재배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호박은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넝쿨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본 뒤 며칠 뒤에 가보면 주먹만 하게 굵어져 있다. 그런데 호박잎에 가려 못 본 것은 시간이 지나면 늙은 호박이 되고 만다.

늦여름 초가을에 이전까지 심었던 채소들을 정리하고 가을 김장 채소를 심는다. 물론 둑 밑 호박은 그대로 둔다. 늦게라도 몇 개 더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와 배추 모종을 심었다. 그런데 이웃집 무와 배추에 비해 자라나는 모양새나 때깔이 좋지 않다. 봄여름 여러 차례 씨앗을 뿌려 지력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화원에서 사 온 거름 몇 포  외에 비료를 전혀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추 속이 찬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무도 뿌리는 그런대로 굵었는데 무청은 시래기를 할 정도가 안 된다. 늦가을 초겨울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할 무렵 무와 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담근다. 며칠 지나 김치를 꺼내 먹어보니 영 질기다. 거름이 부족했고 특히 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탓에 야생 무나 배추가 된 셈이다. 몸에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익숙한 입맛은 아니다. 겨울 지나 봄이 되어 요즈음 그 김치를 먹으면 섬유질이 많아 질기기는 해도 나름대로 깊은 맛이 있다.

- 뿌린 만큼 거둘 씨앗 뿌리기

지난 주 일요일 다시 그 밭에 나가봤다. 주인이 경운기로 밭을 갈고 있었다. 올해는 일반 채소 열 평하고 고구마 감자 열 평해서 스무 평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아저씨가 “농사 잘 못 짓던데요!” 라고 한다. 밭에 매일 못 가니 잡초가 너무 많아서 그랬을 거고, 농약이나 비료를 주지 않아서 늦자라거나 보기가 안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열 평 채소밭에 반찬거리나 소일거리, 더 나아가 즐거운 삶을 위한 선택으로 한 농사일이었으니 망정이지 시장에 내다파는 상품성 있는 채소를 기르는 일이었으면 농약 비료를 사용했거나 아니면 한 해 농사를 망쳤을 것이다. 가끔 아내와 막내 데리고 밭에 가는 일,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구경시켜 주는 일, 이웃과 함께 채소농사를 짓는 일, 많이 수확한 채소를 지인에게 나눠주는 일 따위는 소박함 속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그리고 더욱 소중한 것은 모양은 달라도 ‘뿌린 만큼 거둘 수 있는’ 일이다. 어린 시절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힘든 농사일을 거들던 추억을 되새기는 기쁨이다. 그 속에서 자연의 순리를 새삼 발견한다. 돈이 권력이 만능인 세상사 시끄러워도 올 해 다시 씨앗을 뿌리려 한다.

(2010.3.23, 오마이뉴스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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