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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횡성 들판의 까마귀떼
 최경주  | 2006·03·19 23:40 | HIT : 2,174 | VOTE : 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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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닷없이 하룻저녁 만에 날씨가 영하로 떨어졌다. 횡성에 눈보라 치는 봄 논둑에 까마귀 떼가 검은 전사들 마냥 무리지어 느긋한 선회를 하고 있었다.

  가끔 친구들 끼리 어디를 가자고 길게 논의하다가 문득 날짜가 잡힐 때가 있다. 이번 주가 그랬다. 작년 말부터 또래 친구들과 조합에서 만날 때면 횡성에 내려가자고 몇 번을 전화로 혹은 만나서 지나가는 식으로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날짜를 잡은 것이다. 주말에 가자고 했으나 토요일 저녁 조합원 돌잔치가 있어 부득이 월요일로 연기를 하였다. 더 연기를 했다면 봄에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월요일이란 평일에 시간내기가 가능한 몇 사람이 모였다.
  횡성에 가기로 한 사람은 모두 넷이었다. 나는 손을 다쳐 쉬고 있어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었고, 오산에 있는 천씨와 현장에 용역을 뛰는 이형, 그리고 일이 끊겨 잠깐 쉬고 있는 박씨다.
  천씨는 오산에 내려가 장목사님 댁에서 틀어박혀 있는지 알았는데 가끔 평택 대추리도 가는 모양이다. 대추리 상황이나 옛 조합원인 선배의 근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근래 현장에 다닌다면서 평택집회에 한 번도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평택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문자를 통해서 접하곤 했다. 누가 문자를 그렇게 보내주는지 모르겠다. 천씨는 서울에 있을 때 술로 살다가 오산에 내려가니 얼굴에 그나마 조금 나아진 듯 했다. 주변에 술 마시는 사람이 없어 거의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말 그대로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술을 자제하기 위해 애쓰는 눈치였다. 녀석 덕분에 회성 가는 길에 들른 식당에서 노릿하게 익은 야채부침을 먹으면서 동동주를 시켰다가 취소시켰다. 술을 마시지 않는 박씨의 요구였다. 자제하기 힘든 술꾼들을 낮부터 들이키게 하여 오늘 분위기 상하게 하지 말자는 말이었다. 그 말에 다른 의견은 없었다.
  박씨는 개별 인맥으로 몇 년을 일해 오면서 일거리가 눈에 띄게 줄자 평소에 안하던 단종에 들어가 일을 한다고 했다. 그나마 그 일도 자주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시간을 내 알곤용접을 배워야겠다는 말이 지나가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알곤을 배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직업을 바꾼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정작 기술을 배워야 할 사람은 박씨가 아니라 이형이었다.
  조합에 올 때부터 현장 잡부로만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여전하다.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늘 하지만 기술보다는 재즈감상에 더 시간을 투여하고 있으니 기술을 배울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형은 지난 구정에 거제까지 내려가 일한 돈을 받기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일하고 올라왔는데 그쪽 하청업체 책임자가 연락을 끊은 모양이었다. 조합에서 원청에 전화를 하여 해결을 요청하자 그때서야 부리나케 돈을 주겠다는 전화가 와서 대충 해결을 하고 있었다. 조합 전화 한통으로 고래심질처럼 질긴 체불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이형은 밀린 조합비를 다 내겠다고 장담을 하더니 십 개월 미납 중 오 개월 치만 내고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는 월요일 한바탕 출근이 이루어지고 난 후, 늦은 오전에 조합에서 만났다. 조합은 추가된 상근자 자리를 마련하기위해 어지러이 집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늦었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일찍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부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커피한잔 타서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좋던 날씨는 월요일 아침부터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박씨의 흰 승용차를 타고 강변도로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가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삼월 중순에 무슨 눈인가 싶었다. 양수리 근처에 가니 눈이 멈추는가 싶더니 횡성 이씨 집에 도착을 했을 때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보라가 치는 광경을 차마 그냥 구경만 하기가 아쉬워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도로로 나갔다. 양옆으로는 논에 짚이 곳곳에 쌓여있고 검은 아스팔트길로 소나기처럼 내리는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사선으로 날리는 눈 속에서 사진을 찍었다. 길 양옆 마른 논에 곳곳에 쌓아 논 비료가 곧 봄 농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횡성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점심을 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 돌아다니지 않고 이씨 집에서만 올 때까지 있었다. 도착을 했을 때 평소에 조용한 동네였지만 그날따라 더욱 인적이 없었다. 이씨에게 물으니 동네사람들이 차를 빌려 놀러 갔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만 있을 거라고 했다. 논에 까마귀떼 날고, 날리던 눈발은 녹아 흔적도 없고 찬바람만 불고, 그의 창고 앞에는 얼어 썩은 허벅지만한 칡이 버려져 있었다. 집 한쪽 귀퉁이에 개 두 마리가 한가로이 발을 핥거나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이씨는 일 년 만에 온 친구들을 위해 고기와 술을 사와 상추를 씻고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려 드럼통을 잘라 만든 불통을 끌어다 바람이 덜 부는 집 앞으로 옮겼다. 천씨와 나는 나무를 나르고 박씨는 불을 피웠다. 잠시 후 우리가 고대하던 불이 활활 타 올랐다. 잔 눈발이 날리는 바람 속에서 불통에 철판을 깔고 호일을 씌우고 고기를 깔았다. 곧 바로 기름 타는 냄새와 고기가 구우지기 시작했다. 개가 냄새 맡고 기웃거리고 여전히 멀리 까마귀들이 여유롭게 선회를 하고 있다.
  “까마귀가 정말 까맣다.”
  “최경주, 무슨 말이 그래 까마귀가 까맣지. 정말 말이 이상하다. 왜 그래?”
한손에 고기를 들고 한손에 소주잔을 집어든 이형이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까마귀가 새 중에서 제일 똑똑하다며? 벌레를 잡아먹을 때 도구도 쓴다데. 나뭇가지로 땅을 판다나.”
박씨가 가늘게 눈을 뜨고 까마귀 떼를 보았다.
“똑똑하지. 관포지효라는 말이 있잖아.”
내가 말을 해놓고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논의 까마귀 떼가 음흉해 보이거나 통설처럼 재수 없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어떤 정령 같은 느낌이며 그 커다란 날개가 펼쳐질 때 힘이 느껴지고 검은 윤기가 보였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어보려는데 안 우네.”
박씨가 개에게 고기 한 점을 던지며 말했다.
“재수 없게 까마귀 울음소리는.”
  이형은 고기를 반쯤 물고 옷에 묻은 김치 양념을 털며 지나가는 말을 했다.
  멀리 눈발이 날리다 말다 몇 번을 되풀이 하는 동안 나는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기름이 녹아내리면서 확 피워 오르는 불과 박씨가 활짝 웃는 모습, 천씨의 술을 눈치껏 홀짝이는 모습, 이형의 삼겹살을 뒤적이는 모습, 집주인 이씨의 바짝 깍은 짧은 머리로 불을 피우기위해 연기를 피하며 나무를 올려놓는 모습을 담았다.
  어둠이 내리고 불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서는 팝음악 애호가가 셋씩이나 되니 지독한 괴성의 데스메탈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귀가 얼얼한 고역스런 시간이 얼마나 지나자 자신들의 욕구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음악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때 쯤 오여사가 퇴근해 딸 둘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지난번 횡성에 시내에 살 때 진한 허브 차를 대접받고 난 후 처음이었다.
  오여사가 오자 기름진 고기 대신에 음식다운 음식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제일 맛있는 것은 고구마와 감자였다. 고구마는 숯 속에 묻은 것을 꺼내다 두 손으로 얼러가며 까맣게 탄 껍질을 벗겨 뜨거운 속살을 베어 먹는 맛이 그만이었다.
  저녁을 먹을 때쯤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전 조합원 둘이 왔다. 원주에서 일을 마치고 온 것이다. 서로 사는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맨 나중에 도착한 사람은 유씨였다. 자정이 다 되어서 농민회에서 일을 하고 왔다고 했다. 그곳 부녀들로부터 술에 대한 성토가 워낙에 심해 술을 마시다가 중간에 끊어졌다. 조금의 양해도 허용되지 않았다. 다음날도 일을 해야 했기에 출근하는 사람은 가고 늦게 온 유씨는 남았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와 나는 많은 할 말이 있는 친구였다.
  “지금도 리눅스를 하시나?”
  유씨를 보자마자 내 인사였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언젠가 조합에 용접사로 처음 왔을 때 우연한 계기로 둘이 컴퓨터를 함께 배우게 되었다. 나도 그도 열정적으로 배우다가 도를 넘어서 리눅스까지 탐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리눅스는 까는데 일주일이면 빠르다는 시절이었다. 그는 배운 컴퓨터를 밑천으로 곧 용산에 들어갔다. 그는 장사가 업이 된 듯했다. 그후 몇 년간의 세월이 흘러 어느 날 그가 횡성으로 들어 온 것이다. 직접 술을 마시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오여사와 유씨, 내가 밤늦도록 유씨가 농사를 짓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합에서 용산으로, 용산 점원에서 독립한 컴퓨터가계 사장으로, 다시 코스닥업체로, 일본까지 가서 자기사업을 하기까지 승승장구하더니 어느 날 유기농을 하는 농민에서 다시 운동을 시작한 유씨. 그는 자신이 횡성에 오게 된 것은 ‘침묵이 흐르는 봄’이란 책을 통해서였다고 이야기했다. 영등포문고에서 누구를 기다리며 시간이 남아 책을 보던 중 그 책을 집어 들고 약속을 어겨가며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 책이 자신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머릿속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어떤 정경을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확실한 어떤 세계관이 확립되어 있어 보였다. 그는 몇 번을 내게 물었던 질문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농사란 무엇인가? 대량생산인가? 유기농인가? 자연을 착취할 것인가? 자연과 공생할 것인가? 쌀개방속에 농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그와 내 삶과 결부되어 있는 질문들이었다. 농사는 그저 농부들의 일인가? 유씨는 유기농이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라고 한다.  
  언젠가 십여 년 전에 인천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환경운동이 제일 중요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직 치열한 생존을 위해 이 순간 치열하게 투쟁하는 긴박한 삶들이 있는데 한가하게 무슨 이야기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유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그때 생각이 났다. 내가 환경이나 생태운동에 기본이나 알고 있었단 말인가! ‘침묵이 흐르는 봄’이란 책도 처음 듣지 않는가!
싫든 좋든 끊임없이 말려들어가는 자본의 시스템속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투쟁이 아닌 최소한의 대안적 삶에 대한 투쟁을 해봤던가? 그 대안적 세계관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해봤던가? 내 스스로 부쩍 고민하게 하는 화두다. 아직도 화두 자체가 불분명한 고민 덩어리다. 내 스스로 무엇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유기농을 몇 해를 지어본 유씨는 결국 자신이 어느 날 돌이켜 보니 몇 년후 투쟁의 현장에 다시 서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 시점과 접점에 다른 길을 걸어 온 우리는 십여 년 전 리눅스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했듯 지나온 삶을 밤 늦게 나누었다.  

  언젠가 조합에 책장을 살피다가 한 구석에 꽂혀있는 두 권의 책을 보았다. 누가 갖다 논 모양인데 먼지 쌓인 오래된 책이었다. 몇 번의 이사와 책장 정리에 살아남아 있는 책 중에 하나였다.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세계체계론’에 관한 입문서였다. 그 중 쉬어 보이는 듯한 책을 한권 꺼내 읽어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결국 끝까지 읽고 나머지도 하나 더 읽었다. 두 번째 책은 어려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세계는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의 두 축으로 편제해 나간다고 한다.
  미국중심의 다국적 기업의 기조로 세계의 경제가 블랙홀에 빨리듯 빠르게 흡수되어 나가는 현재의 세계화를 보면서 가끔 그 책의 이론이 납득이 갔다. 그 책에서 특이한 것은 사회주의에 관한 글이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이다.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소련이나 중국도 경제적으로 또 다른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세계 자본주의 중심의 축으로 편제되어 갈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그 책이 언제 쓰였나? 80년대 중, 90년대 초쯤. 조합에 가서 다시 봐야겠다. 그 책이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책의 저자는 세계 경제가 착취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 중심으로 빠르게 편제되어 가는데 그에 대한 대응이 무엇인가에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저자는 정확한 답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마 있다면 각 나라의 고유한 성격이 있는 민족주의가 아닌가하는 어설픈 답을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꽤나 지난 책이니 지금은 세계체계론이란 이론에서 어떤 답을 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씨와 새벽이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왜 그 책이 생각이 나는 걸까? 쌀개방이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 우리가 미국의 쌀과 농산물 소비국이 되고 그네들의 전자제품 공장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져서 그런가? 세계화시기에 어쩔 수 없는 조건인가? 그럼 정치적으로는?
  도대체 수천 년을 부쳐 먹어 온 이 땅이 이 시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새벽 4시가 지나는 것을 보고 이불 펴고 누워 불을 끄고 이런 저런 자기 처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2
  꿈을 꾸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들판에 섰다. 곳곳에 볏짚더미가 있고 갈아엎기 전의 논이 부드러운 흙이 새봄의 더운 기운을 가득 담고 있었다. 멀리 신새벽이 오고 검은 티와 바지를 입은 진하고 윤기 흐르는 긴 머리의 청년들이 들판에 놀고 있었다. 한두 명의 여성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 사내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 가고 있었다. 제기차기도 하고 짚더미에 기대어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내도 있었다. 공으로 축구도 하고 둘러서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힘이 넘쳐 보이는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왜 그들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나는 호기심에 열띠게 토론을 하는 사내들에게 다가섰다.
  바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친 바람에 관해. 그 바람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어떤 죽음이 느껴졌다.
  “당신들은 사자입니까?”
그 둘 중 한 여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눈이 맑고 긴머리 어디서 본 듯한 여인이었다. 사실 나를 알고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 검은 옷차림에 엉뚱한 질문이 나왔다.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이들은 우습다는 듯 소리 내서 웃었다. 그 말에 안심이 되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지만 도통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바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녀가 나를 바보로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산에서 왔음을 알았다. 깊은 숲에서. 나는 당신들은 강원도 숲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웃었다.
  “우리는 바람을 기다려요. 곧 무서운 바람이 불겁니다. 죽음의 바람이요.”
그녀는 그 바람 이야기를 하면서 울먹였다. 나도 그녀와 같이 바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고 가슴이 어떤 공포가 느껴졌다. 그리고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처와 아이들, 형제들, 쓰러진 집터에 그들이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들었다. 공포에 내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흐느끼자 그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뜻한 손이 나를 안정시켰다. 그들의 건강함과 검은 머리와 붉은 피가 선명하게 돌 듯한 입술과 안심시키는 눈빛.
  “바람은 바람일 뿐입니다.”
  선명하고 가슴속에 전해오는 그의 목소리.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넓은 논에 나 홀로 있었다.
  검붉은 바람이 서서히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이 유황가스를 머금은 죽음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짚더미에 숨었다. 숨기는 했지만 분명 얼마 못 버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실 수 없는 유황냄새, 뜨거운 공기, 산의 나무와 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 뽑혀 하늘에 뿌려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더 세어지자 짚더미들이 뜯겨져 나갔다. 나는 친구들을 찾았다. 아까 들판에서 봤던 이들을 찾았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여기는 분명 이씨 집 앞일 텐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강한 바람 속에 아직 살아서 헤매고 있었다. 서울에도 이 바람이 불까? 가족들은? 아이들이 울부짖을 것 같았다. 처는 막 난 아이를 이불에 싸 어디 부서진 담벼락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그래 상상일 뿐이다. 그저 바람일 뿐이고 집은 아무 일없이 내가 여기에 오기 전처럼 한가하게 있을 것이다. 이건 꿈일 뿐이다!’ 꿈에 꿈을 알다니, 하여간 그런 생각이 들자 집에 전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있어야할 전화가 없었다.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 집에 있는 쪽으로 뛰어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불같이 뜨거운 바람이 계속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으며 아무리 가도 바람뿐이었다. 바람에 모두 날려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를 그러고 있는데 친구 박씨가 나타났다.
  “여기서 뭐해 서울 가야지?”
  박씨였다.
  “어디에 있었는데?”
  “너 찾았지. 빨리 가자 차가 안전해.  ”
  “다른 친구들은?”
  “차에 있어.”
  “혹시 까만옷 입은 사내들 못 봤어?”
  “까마귀들. 봤지.”
  “어딧어?”
  “싸우지. 하늘을 봐!”
  “어디?”
  나는 하늘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하늘에 거대한 까마귀 떼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 한편을 메운 보도 듯도 못한 검은 그림자의 거대한 새를 공격하고 있었다.
  “붕, 붕인가?”
  이 바람이 그 새의 날개 짓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
  까마귀의 날개깃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까마귀 떼의 검은 소용돌이가 붕처럼 큰 괴조를 휘감아 치고 있었다.
  꿈이었다. 깨보니 날이 환하게 밝아 햇살이 창에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친구 천씨와 오여사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3
  아침이 화창하게 밝았다. 영하는 전날로 끝나는 모양이다. 전날의 바람도 없었다.
  아침을 먹는데 후배 황씨 처인 병선씨가 몇 가지 선물을 들고 들어와 인사를 나누었다. 출근길에 들른 것이다. 처와 동갑내기라 선물을 준다고 도라지청과 포도주 원액을 준다. 유기농 제품이라고 한다.  
  아침을 먹고 오여사와 아이들을 보내고 우리는 서울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냥 떠나기가 아쉬운지 천씨가 옻나무를 구하러 간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가 갔다 오는 동안 나머지 친구들은 영화 한편을 보고 한미 야구가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천씨가 빈손으로 오고 우리는 점심을 먹고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어이 경주, 우리가 미국을 이길 수 있을까?”
이형이 내게 물었다. 나머지 두 친구는 스포츠에 담을 쌓고 사는 친구였다. 박씨는 음악뿐이고, 천씨는 투쟁과 술이 관심사였다.
  “힘들걸.”
  “그래도 한 점 냈잖아. 어이 박, 어디 휴게실에 들러 야구 마저 보고 가야하는 것 아니야.”
  “형도 참, 무슨 얼어 죽을 야굽니까. 차 밀리기 전에 빨리 가야지. 그런 헛소리 그만 하시고 어디 비료 하나 주워 담아요. 상추 좀 심어 먹게요. 서울 가면 저런 비료 구하지도 못해요. 아주 비료 천지네.”
  “야, 지금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주워 담으며 어디서 딱 보고 있다가 나온다. 그럼 지금까지 이 동네에서 없어진 닭이나 개까지 다 물어 줘야 해. 그나저나 어디 가게에 들러 커피하고 물 좀 사자 간밤에 늦게 잤더니 죽겠다.”
  가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서야 필요한 것을 살 수가 있었다. 화장실에 들러 소변을 보고 매점에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데 깜짝 놀랐다. 도로도 한가하고 휴게실도 한산하여 매점에 여직원 서넛이나 있거니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사내 한 무더기가 입구에 빼곡히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야구다!”
  이형이 소리 지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도 가까이 가서 보니 눈을 의심할 내용이 화면에 그려져 있었다.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무려 일곱 점을 뽑고 있었다. 경기는 거의 끝나기 직전이었다. 저대로라면 미국은 한국을 이기기 힘들었다.
  “저게 말이나 되냐? 야구종주국이라는 미국을. 자본이나 인적역량이 비교되 되지 않을 텐데. 안 그래? 저게 현실이야 뭐야?”
  “글쎄 말이요. 미국 돌아버리겠구만.”
  우리는 그렇게 횡성을 다녀왔다. 아마 올 겨울이나 또 갈지 모르겠다.
미국을 이긴 이야기는 뉴스의 반을 차지했으며 일본전이 있기까지 계속되었다. 운동은 가끔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낸다.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결과를 말이다. 운동은 종종 조건과 환경을 급격히 변화시킨다. 그 맛에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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