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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여의도 현장에서
 칼럼니스트  | 2009·09·07 14:00 | HIT : 1,484 | VOTE : 177 |



    9월 1일 이후 여의도 현장에서 준공을 앞두고 철수를 했다. 한두 번 하자를 보러 갈 일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모든 작업에서 손을 뗐다. 지금쯤 준공검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원래 목표라면 입주를 시작해야 하지만, 현장을 나올 때쯤에는 늘어질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부분적으로 입주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올 때쯤 공사 대부분은 마감됐고, 설비가 마무리가 늦어지고 있었다. 세대에는 실내장식 공사는 끝났고 DIOS 상표가 달린 냉장고가 백 이십여 세대에 들어오고 복도마다 CCTV가 달려 작업자들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엘리베이터는 화물용에서 인승용으로 바뀌었고 준공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도 입주 청소로 바뀔 처지였다. 체조를 할 때면 직종마다 서너 명씩만 남았다지만 그래도 육칠 십여 명이나 되었다. 11개월을 작업한 여의도 현장은 여러모로 특이한 현장이었고 전에 겪어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한 여러 상황을 겪었었다.
거의 한 일 년을 일했으니 한 달쯤 쉬려고 했는데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처와 아이들이 좁은 거실 벽에 기대 논 노란 소파에 앉아서 아빠 적당히 쉬고 일 나가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는 눈치다. 사실은 실업급여를 믿고 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용안정센터에 갔더니 건설노동자 기본 날수인 180일이 되지 않았다. 30일이 빠지는 150일이었다. 거의 5년간을 일했는데, 신고 된 날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나는 그 직원들 책상을 걷어차고 대한민국 당장 때려치워!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또, 당장에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거의 막판까지 함께 일했던 이씨 형님이 내 사주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가족을 위해 끝까지 노동해야 할 팔자라고 말을 했다. 형님은 태고종 스님이었다. 두어 달 동안 수도자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현장을 떠나 지금은 벌목 일을 하고 있다. 김소장은 그것만큼 좋은 팔자가 없다고 좋다고 했다. 실업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현장을 나오면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알파벳 K처럼 생겼고, 어떻게 보면 X자처럼 생긴 회색건물이었다. 회색이 아닌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뼈대와 콘크리트만 있었는데, 이제는 미래의 건물처럼 푸른 하늘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고층에서 11개월 내내 국회의사당 녹색 동판 뚜껑을 바라보았으며, 탁한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을 쳐다보았다. 가을 겨울 봄여름을 말이다. 거의 막판에 한가할 때는 아침에 체조를 마치고 작업복 차림으로 김소장과 박중사 나와 셋이서 토스트를 사 들고 휼렛패커드 건물 앞에 공원에 가 벚나무 그늘 앉았다. 아침부터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건들거리는 나무 그림자, 아침에 출근하는 전문가들. 또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여의도 공원까지 영역으로 돌아다니는 마스크와 벙거지를 쓴 노숙자였다. 덥지도 않나? 토스트를 먹는 우리를 노려보고 지나치곤 했다. 한입 먹고 싶어서 그런가, 아니면 뭔가가 불만스러운 눈빛이었다. 우리가 없다면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하는 눈초리로가 아니었을까? 노숙자들이 가장 친근하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노가다가 아닐까 생각이 들곤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 노가다는 노숙인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면서 꺼리는 종족이라서. 명확하게 다르지만, 불리는 이름이나 형색이 비슷하다. 서로 눈빛을 보면 처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건설노동자의 자부심으로 노가다를 보는 사람이 보면 분노를 참지 못하는 말이 되겠지만, 사회적 인식이나 계급적 근접성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여간 우리는 그를 볼 때마다 ‘길거리에 그만 있고 이제 현장에 나와 일을 하시지!’ 하는 눈치고, ‘너희도 곧 나처럼 된다. 담뱃값이나 주라!’ 하는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와 내가 명확하게 다른 것은 나는 조직된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는 방치되어 있다는 차이겠다. 현재 이 사회에서 조직된 노동자는 생각보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있다. 노숙자는 그런 면에서 거의 모든 권리에서 격리되어 있거나 다른 차원을 떠도는 이면의 종족들이다.
“여기 지금 우리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이야, 여의도잖아.” 김소장이 토스트를 다 먹고 은박지를 구기며 말을 했다. 의례 여기 앉으면 하는 말이다.
“당연하지. 저 여자들을 보라고, 내가 보기에는 강남이나, 명동 못지않게 잘나가는 사람들이야. 모두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한다는 사람들이라고.” 뭔가를 쏟아 내어 하루를 시작하자는 말이었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말을 조금씩 바꾸어 가며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말이라는 것을 쓰레기 같은 말들이었지만 할 때마다 나무 그늘처럼 신선했다. 마치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서 나오는 배우들이 시작부터 연예인이야기를 하듯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연애와 스포츠, 그리고 정치, 대부분은 비난하고 헐뜯고 울분을 토하는 말들이었지만 실상에 활력과 쾌락을 주었다. 바람도 좋고 토스트도 맛있으며 매미 소리도 듣기 좋았다. 출근하는 수많은 사내와 멋진 다리의 여성들, 그리고 어제 일어난 수많은 가십거리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머릿속을 재부팅하고 재정리 혹은 부팅을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멋진 양복과 정장을 하는 여의도 친구들이 우리를 어떤 눈으로 쳐다볼까? 저 인간들 일 안 하고 또 여기서 땡땡이치는군. 그런데 도대체 저놈들은 몇 시에 출근을 하는 거야? 잠도 없나, 노가다 하는 자식은 낳지도 말아야 해. 끙, 지겨운 하루가 시작되는군! 그렇게 말하거나 우리가 안중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지겨운 공사 빨리 끝났으면 할지도 모른다. 몇 년째 여의도 3번 출구 근처에 집중적으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 X 외에 9호선 지하철이 개통되었는데 여전히 공사는 진행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을 건너는데 아침마다 작업자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 건너편에 더 큰 건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과 미디어 센터 쇼핑센터 등 꽤 큰 공사인데 아직 건물이 본격적으로 올라오지도 않고 있었다. 올겨울이나 본격적으로 시작될는지 모르겠다. 그 근처에는 우리 말고 어슬렁거리는 친구 하나가 더 있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앉으면 한 번쯤 그가 어디에 있나 확인을 했다. 노숙자 친구 말이다. 그런 친구는 친근하다. 내 주변에는 비슷한 사람이 늘 있으니 더욱 그럴 게다. 지금쯤 그 친구도 우리를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매일 아침에 와서 토스트 먹고 떠들어 대며 웃던 세 놈이 왜 보이지 않는 걸까 하고.

어제 그제 시간이 나서 면회를 다녀왔다. 어제는 서울구치소 천씨에게, 그제는 K형을 보러 평택 구치소에 갔다. 평택은 꽤 멀었다. 10분 면회를 하자고 2시간 올라가서 1시간 기다리고 다시 2시간을 허비하며 올라왔다. 내가 투덜거리자 함께 간 박씨는 먼 지방으로 가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을 하자고 했다. 두꺼운 투명 칸막이를 사이로 마이크를 통해 K형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아주 반가워했다. 누가 면회를 오는가 물었더니 쌍용에서 낯모르는 사람이 두 번 왔다 가고 돈도 넣어 주었다고 했다.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혼자 독방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천씨는 요즘 징역 사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투덜거렸다. 자기는 한 방에 여섯이나 있다고 투덜거렸다. 일곱이면 칼잠을 자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K형은 편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는 웃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은 우울했다. 결정적으로 조합에서 생활 보조금을 타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도 그게 궁금했는지 이야기 막판에 조합 심사 결과를 물어보았다. 재심까지 청구를 했지만,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 주는데 그의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잡히던 날, 평택 법원 사거리에서 수천 명이 모여 집회를 했는데 서른 몇이 경찰에 잡혔다. K형은 그 낮은 확률에 끼었고, 다시 그중에 네 명 구속되었는데 또 거기에 끼었다. 평소에 무엇인가에 극적으로 선택되어 본 적이 없는 그가 그런 낮은 확률에 들어간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악마가 건 불행에 관한 복권이라면 형은 로또라도 맞출 것이다. 그가 그만큼 투사였나? 그럴 리가! 어쨌든 K형은 교도소 안에 있었고 엄연한 현실이었다.
올해 여러 가지 깨우친 중에 서너 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K형이고 또 하나가 노무현이다. 노무현을 통해서 전선이란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수라고 칭하는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그는 거대한 가로막이었다. 그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나는 그 테두리 안에서 많은 것을 누렸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방북에서 복지까지 많은 내용을 허용하고 관철했다. 그가 해주지 못해 아쉬운 다른 내용은 당사자들 몫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해 겨울, 국보법 철폐로 여의도 농성장에 들락거릴 때 농성을 하면서도 철폐가 버거워 보였다. 국민의 염원이라고 말을 하기에는 참여 숫자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국보법 철폐에 대한 열정은 하늘을 찌르고 언 아스팔트를 녹였지만 결국 노무현에 대한 압박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있을 때 해결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는 늘 뭔가에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정권이 바뀐 지금 처한 처지로 그를 평가해보니 더욱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 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절대적 잣대를 들고 누구를 만나건 정과 사, 좌와 우를 나누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싶다. 결국, 내부의 적도 아닌데, 동료끼리 성격을 규정해내는 일상이 분열이었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내 경우도 늘 내 옆 사람을 어느 편에 서 있나 가르고 밀쳐내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닥쳐! 어쨌든 너는 노동자야, 늘 그들이 밟고 서 있었다고! 그들의 입과 손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순간에도.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너는 파쇼노동자야! 라고 말해도 머릿속에 든 생각은 어쩔 수 없다.
노무현은 그렇다 치고 K형을 통해 묘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형은 조합에 정권자였다. 3년 전에 그의 조합원으로서 권리가 정지되어 있었다. 형은 조합에 몇 년을 있으면서 여기 저기 용역을 나갔으나 일반공이였다. 우리가 하는 말로 일당잡부였다. 잡부라는 말은 늘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꺼리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건설노동자를 노가다라고 부르는 말과 같다. 노가다라는 말이나 잡부라는 말은 우리끼리는 평범한 말이지만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부르면 천박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분노를 일으킨다. 그 형은 전형적인 잡부였다. 형은 여러모로 현장에서 노동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동작도 느리지만, 작업에 대한 이해는 더 늦었다. 그저 단순한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노동강도나 시간이 세계적이라는 남한 사회에서 그가 기능공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일은 맨손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일 만큼이 어려운 일처럼 보였다.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남한의 노동일은 나 같은 들개나 생명력 강한 잡초들에 맡기고 파란 눈과 노란 머리칼이 날리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쯤에 태어났어야 했다. 61년생인 K형은 결국 이렇다 할 기술 없이 이삿짐까지 병행하는, 58생 정박사가 농담으로 일컫듯이 직종을 넘나드는, 범 제너럴 워커였다. 형은 결혼을 못했다. 늘 혼자였다. 여자를 갈구하지만, 대부분의 여자가 거리를 두었고 근래에는 그런 여자조차 없었다. 또 결벽증도 있었다.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한 데 왜 그런 이상한 버릇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척을 하는지도 몰랐다. 항상 손을 씻었고, 늘 지저분한 나를 탓했다. 텔레비전에서 나온 모든 해로운 음식을 가렸다. 반면에 술과 담배는 끊이지 않고 마시고 피워댔다. 그 K형뿐만이 아니고 주변에 생활의 모순이 뚜렷한 사람들이 꽤 있다. 알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너무 자주 겪는다. 마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람이란 책에 나올 법한 인물들이 말이다. 형은 나에게 재즈를 들으라고 늘 권했지만, 아직 ‘모 베터 블루’ 외에는 아는 게 없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재즈 마니아였다. 시간과 돈이 생기면 홍대를 갔다.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이상한 모자를 쓰고 체크무늬 셔츠와 꽉 낀 바지를 입는, 우리의 제너럴 워커는 가끔은 정치에 대한 울분을 터트리며 진보주의자처럼 사고하고 행동을 했다. 어쨌든 그는 밑바닥 생활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게다. 사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떨어지는 두뇌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강도가 센 건설일과 느리고 굼뜬 동작에 대한 가혹한 이 사회의 요구가 맞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감속기를 단 사람처럼 움직였다. 평택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돌을 던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요즘 집회에 가보면 싸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돌이라도 들라치면 경찰보다 먼저 카메라가 달려든다. 그리고 멋있게 던지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제대로 찍히게 말이다. 휴대전화부터 비디오까지 그 멋진 한 장면을 열광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경찰이 가까이 왔었다고 했다. 난 항상 그에게 말을 했었다. “형이 현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자 보라고 나는 이렇게 움직이는데, 형은 뭐 좀 달라고 하면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인단 말이야. 이렇게 느리게, 마치 나를 심장마비로 죽이고 싶은 것처럼. 형이 사장이라면 누구를 쓰겠어? 음속의 나 아니면 인간 감속기? 자, 돈을 어디로 지불하겠냐고. 이게 현실이야, 현실! 형 모습을 보라고 생활, 존재 자체를. 눈으로 머리로 보라고. 형어머니가 없었으면 형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노숙자지!”
“당연하지. 재즈 듣는 노숙자. 멋있기는 한데 처참하단 말이지.”
“그게 재즈야!” 박씨가 형편을 들었다.
“너 재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 나는 무식한 놈이요 말하는 거다.” K형은 담배를 피우며 말을 했다.
“재즈가 아니라 형을 말하는 거야. 치열하지 못한 삶을. 감속기가 도구가 아닌 일부가 되어 버린 형을.”
“그러는 너는.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못한 것 같다. 능력도 없는 게 애는 셋씩이나 낳아서.”
“그건 능력이야, 이 양반아! 형은 그걸 구분하지 못한다고. 문제와 답을, 연필도 굴릴 수가 없는, 넷 중에 아무거나 찍으면 답이야. 형은 늘 손등을 찍고 있다고.”
“지금은 네 입을 찍고 싶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걸 찍었다. 아니면 가장 정확하게 모처럼 답을 찍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쌍용상황이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항상 경찰과 사장님들은 깃발을 내려놓고 이야기로 하자고 한다. 그 깃발을 내려놓고 악수를 하는 순간, 그들은 손에 쇠고랑을 채우고 손해배상 청구서를 내민다. 형은 가볍게 몇 개월 혹은 일 년은 살아야 할 것 같다. 지난달 택시기사와 싸운 대가로 받은 벌금도 해결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쌍용이 그의 일이었나? 그는 거기에 왜 갔을까? 그래서 그 후에 뭔가 문제인가? 문득 하나의 고민이 나에게 다가왔다. 전혀 다른 의문으로 말이다. 그와 내가 뭐가 다른가 하는.

내 주변에는 두 가지의 노동자들이 있다. 조직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 K형이 집회에 온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대회라고 했으니 당연히 그에게도 자격은 되었다. 우리는 그 후에 일어날 일은 꿈도 꾸지 못하게 천안행 급행열차를 타고 평택 법원사거리로 갔었다. 아무도 싸움을 하자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앞에 나갔다. 그는 동작만 느린 게 아니라 늘 가슴속에 품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군중심리에 의협심이 앞섰을 수도 있고 얼떨결에 나갔을 수도 후배들을 잘못 만났을 수도 있다. 어두운 법원 사거리로 왔을 때 형이 연행된 것을 알았다. 집에서 쉬고 있던 형을 불러낸 박씨는 암담한 얼굴로 전해 주었다. 그는 불러낸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음날 현장에 출근해 체조하고 전화를 하는 일이었다. 민주노총 김형에게 전화해서 형의 연행을 알리고 조합에도 알렸다. 곧 민주노총 법률원에 사건을 위임하기로 했으나, 고민되는 것이 있었다. 그 형이 정권 조합원이라는 것이었다. 벌써 조합비를 내지 않는지가 3년이 흘렀다. 줄곧 이삿짐을 했으며 중간에 어디론가 잠적을 해 사라진 게 1년쯤 되었다. 며칠 후,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사건을 맡지 않기로 판단을 했다고 했다. 그것이 당사자에게 유리하다고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조합 심사에서 조합원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인정이 되었다면 구속자 구제기금에서 일당이 나왔을 텐데 그게 날아가 버렸다. 갑자기 그 돈이 사라졌다고 생각을 하니 뭔가에 화가 났다. 그게 뭘까? 그 형이 옛 조합원이었기에 변호사는 대 주기로 했다고 했다. 혹시나 하고 밀린 조합비 93원을 급조해 밀어 넣었던 박씨는 허탈하게 웃었다. 얄팍한 수를 쓰는 것 같아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그 돈을 안 보낼 수가 없었다. 돈이 아까워 그대로 있었다면 심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다 뒤집어써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심의 결과가 누구 탓은 아니지만, 어쨌든 구속된 사람으로서 보면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상근을 하는 후배에게 들어보니, 재정 형편이 비조합원으로 규정된 형에게 도움을 줄 만큼 좋지가 않았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원칙에도 어긋나고. 결국, 그를 거기에 부른 사람만 문제가 된 것이다. 그곳에 참석한 본인에게는 문제가 있고. 근데 참석이 문제였나?

그때, 은행나무, 벚나무 아래서 토스트를 먹으며 김소장에게 그 말을 했었다.
“나는 깨달았어. 정말 중요한 것을, 조직된 노동자는 상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비록 이런 작업복을 입고 길에서 토스트를 먹으며 지나가는 여자들 다리에 침을 흘리고 있지만. 그야말로 상당한 힘이 있다고 민주노총도 사회적 권력집단이야, 거대한. K형 말이야, 결국 떨거지였단 말이지. 난 잊고 있었어. 아니 생각지도 못했지. 늘 내 처지가 부당하다고만 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엄청나다는 것을. 놀라운 사실 아닌가! 주변을 보라고. 민주노총 조직률이 얼마나 되지? 그렇지 못한 노동자 비율은?”
“혹시 그것이 자기 처지만을 바꾸는 운동과 만인을 위한 혁명의 차이가 아닐까? 진정한 진보.” 박중사가 심각하게 듣더니 그 말을 했다. 놀라운 일이다. 박중사 머리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그 자체가 혁명이었다.
“단순한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김소장은 토스트를 마저 먹고 손을 털었다.
“아니야, 뭔가 있어. 분명히 심각한 뭔가가!”
확실히 여의도 생활은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현장이었다. 정말 특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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