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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신년회 다녀 오는 길
 칼럼니스트  | 2009·02·07 04:25 | HIT : 1,902 | VOTE : 175 |




          삶창에서 모처럼 신년회 자리가 마련되어 명화극장 건너편에서 도착했을 때는 오후 8시쯤 되었고 토요일 주말이라 영등포 공구상 공장들이 대부분 문을 닫아 한산하였다. 약속한 장소인 은행나무 식당은 삶창 사무실 건너편 골목 안에 있었다. 식당은 철시한 공장들 틈에 불을 밝히고 비어 보였으나 안쪽 방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비어 있는 홀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 보니 아는 얼굴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반겨 주었다. 탁자 위에는 상추와 밑반찬들 빈 잔과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불판 위에는 삼겹살이 지글거리며 익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깊게 나누는 사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고 1차를 마무리하였다. 다음날 할 일을 생각해 더 늦게 앉아 있기가 그래서 일어나 다른 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발을 돌렸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옷에 배긴 탁한 고기냄새가 났다. 소주를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띵하고 두어 시간 전의 일들이 하나씩 살아났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영등포, 명화극장이 아닌 명화 나이트클럽, 공구상과 민주노총, 대부분 글을 쓰는 작가들이었지만 민주노총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데, 어두운 영등포로터리 왼쪽 길 건너에 최근 복잡한 성폭력 사건에 휩싸인 민주노총이 서 있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아까 모임 자리에 온 허부위원장님이 사퇴를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 민주노총이여! 큭, 총알이 흔들리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듯 흔들리는 건가! 무엇을, 어떤, 얼마의 대가를 지불해야 우뚝 설 수 있을는지. 전날 밤에 아는 노무법인에 들러 그쪽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데, 그곳 여성 소장이 울분을 토하며 제 3노총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최상위 간부들을 탓하던 생각이 났다. 애증이 애증을 부르고 지도해야 할 간부들이 거기에 기름을 붓고 있으니, 으하! 쓰라린 가슴이여, 이를 어찌하오리!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건널목을 막 건너는데 문소장과 서산에서 올라왔다는 노동자 동지가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부천에서 온 친구들만 2차를 안 가고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이 두 양반도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마저 앞선 두 사람은 헤어졌다. 문소장이 영등포역 쪽으로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데, 아마도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깨에 멘 가방은 가벼울 게다. 그 안에는 흰 돈 봉투가 들어 있는데, 낮에 규모가 좀 있는 노조에서 강의하고 받은 강사료다. 회비납부를 하는 것을 옆자리에서 보고 물어보니 오늘 받은 강사료라고 하였다.
1차 신년 모임을 마치고 필진들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려고 대부분 2차를 가고, 부천 친구들만 따로 집으로 간다고 빠졌다. 신대기선생과 류선생, 이선생 그리고 내가 부천 일행에 속했다. 꽁지머리 신대기선생이 은세공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하며 인사를 했고, 오늘 잔치 국수를 시켜준 류선생과 이별의 인사를 했었다. 끝에 서서 손을 흔들었던 이란주선생은 글로만 봐서는 상당히 활달한 성격이라고 짐작을 했었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인상이 아니어서 좀 의아했었다. 이선생이 사시는 곳이 도당동이라?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다, 그런데 도당동이 어디지? 먼가? 그런가····· 지도를 보니 북부도서관 있는 곳이다. 음, 그렇군. 하여간, 각설하고. 은행나무식당에 있을 때에는 줄곧 내 앞에는 당대의 김성환위원장님과 형수님이 앉아 있었다. 거의 8시에 도착해 10시 반쯤에 나왔으니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 2시간 반 동안 인연을 쌓은 것이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엄선생이 옆에 있다가 위원장님을 인사시켜 주었다. 속으로 아, 이분이 그 유명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만남은 결국 인연을 만들었다 풀었다 하는 모양이다. 마치 도로에 난 차 바퀴처럼 검은 아스팔트에 흔적은 없지만 숱한 바퀴들이 엉키고 풀어지고 스치고 늘어서고 엇갈려 가는 길에 순간순간의 만남일 게다. 인사를 하고 앉아 뭐부터 먹을까 하는데 소주를 내밀었다. 빈 잔을 들어 소주를 받는데 “박영근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를 닮았군요.” 하고 말을 건넸다. 김위원장님의 그 말은 작년에 인천시청 앞 건널목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박영근시인이 친구시면 58인신가요? 저는 63생인데.” 58이면 긴급조치 마지막 세대다. 승무형이 그다지도 강조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긴조시대라고. 지금 어느 자리를 가도 이 세대면 거의 좌장이고 상석에 앉는다고 했다. 허긴 58생이면 쉰이 넘었다. 내가 처음 조합에 왔을 때 50이 넘으면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고 장기수 어른들 아니면 그 나이가 드물었다. 세상 다 살아오신 양반처럼 대접을 받았는데, 지금은 50이면 어지간한 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세대와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띄엄띄엄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정사와 투쟁의 이야기들, 확실히 투사들은 점잖게 있어도 살아있는, 생동하는 냄새가 난다. 잠시 후 문소장이 옆으로 오면서 다른 탁자 못지않게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탁자 네 개를 이어붙인 중간쯤에 앉아 있었고 내 앞으로는 박일환선생님쪽 탁자가 있었고 뒤로 두 줄의 탁자가 더 있었다. 족히 50명을 넘을 것 같았다. 대부분 삶창과 관계되는 사람들이었다. 한 번씩 책을 냈거나 낼 준비를 하고 잡지에 글을 싣는 작가들이었다. 삶창을 살찌우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근데 왜 처음 나에게 인연을 만들어준 송시인은 보이지 않지, 오늘 바쁜 일 있나?
술자리가 깊어지니 목소리도 더욱 커지기 시작해 상대방이 말을 하면 허리를 굽혀서 들어야 했다. 앞에서 허리를 펴고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는 김위원장님께 박영근 시인에 관해 물어보니 시인보다는 그분과 사셨던 여성분에 관해 언급하시며 그분과 인연이 있다고 하셨다. 박시인이 결혼을 하셨나? 박시인을 직접 본적이 없다고 해서 그럴 리가 생각하고, 그럴 수도 있겠지 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집에 놀러 갔을 때마다 술에 취해 누워 있는 모습만 봐서 정식으로 대면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말 자체가 박시인에게 가진 어떤 불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았다. 늘 투쟁 속에 자신을 추슬러야 하는 전형적인 활동가가 난세에 술에 잠겨 사는 시인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줄곧 내 머릿속에 뜯어낸 스프링공책에 연필로 그린 한 장의 그림이 떠올랐다. 오토바이를 문밖에 세우고 두 부부가 방문한 집에 한 여인이 수줍게 반기고 방안 한구석에 시인이 모로 누워있는 모습이 말이다. 머리맡에 빈 소주병이 하나는 세워 있고 또 하나는 눕혀있는, 천장에는 비딱하게 형광등이 달렸고 방에서 나오는 환한 불빛으로 두 부부의 그림자가 오토바이까지 늘어선, 마당에 소나무 하나 있을 법한. 시인의 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곧게 보지 못한다. 박 시인은 생전에 어떤 세상을 무엇을 봤을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과 시인 그리고 긴장한 상태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싸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오늘 신난 사람은 영숙씨다. 자리를 파하고 나오는 길에 박일환선생님이 보이지 않아, 집에 가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늦게 나오시나? 유리문을 통해 식당 안은 쳐다보니 식당에서 주인아주머니와 계산을 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무슨 말인가를 나누고 손을 쭉 뻗어 아주머니를 껴안는다. 음식 값을 깎아 주셨나? 오늘 기분이 좋다고 이야기를 할 만큼 좋은가 보다. 훌쩍 커가는 삶창을 봐서 그런가? 애인이 생겼나? 처음 들어 왔을 때, 박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을 때, 부재가 길어지고 있다며 이리저리 부지런히 자리를 챙기며 돌아다녔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박선생님이 와서 전체 인사를 이끌 때도 분위기 띄우는 추임새를 빼먹지 않았다. 지금도 영숙씨의 힘찬 박수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김위원장님 형수와 가정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왼쪽 대각으로 끝에 앉아 있던 류선생이 아저씨라고 나를 불렀다. 내가 네 살배기 막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할아버지 소리는 들었어도 아저씨란 호칭은 거의 듣지 않는데 약간 색다르게 들린다. 내가 아저씬가? 아닌 것은 아니니, 차라리 총각이라고 부르면 더 좋을 텐데. 아닌가? 그렇다 치고, 류선생이 잔치국수를 손수 시켜준다. 이런 과분한 호의가 있나. 이래서 친분이 좋은 것 아닌가? 역시 사람은 같은 고향이 아니면 한동네에 살고 봐야 한다니까.
문선생은 말을 잘한다. 그래서 강사로 다니겠지만, 오랫동안 활동을 해서 그런지 예리하다. 대충 흘러갈 수도 있는 말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이 실수를 지적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를 달구었다. 급기야, 최근 터진 민주노총 문제도 이야기하고 용산문제에 이르러서는 분통을 터트리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용산 대책위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함께하면서 더 깊어졌다. 용산 철거투쟁은 거대한 사건의 시발점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뜻하지 않는 사건이 종종 그렇듯이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잘 모른다. 부마항쟁이나 YH가 그러하듯, 현 정부는 피해가려고 하지만 그들은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느낌이다. 죄를 뒤집어씌우고 왜곡하고 피하고 두드려 패보지만 이를 어찌하오리다. 역사적 진리는 만물의 중력과 같다. 어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잘못에 대한 책임은 죽어서도 져야 한다. 누가 역사의 그 큰 책임을 물을 것인가! 내가? 불경기에 일당 빼 자식들 먹여 살리기도 바쁜데?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한다. 삼성을 상대로 매일 노동의 역사를 쓰고 있는, 내 앞자리에서 소주잔이 날아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듣기만 했다. 마음이 무겁다. 침묵하는 나를 시대가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내 몫을 할 것인가! 일단은 소주부터 한잔 마시고.
내 왼쪽 한자리 붉은 방석이 있었는데 엄선생이 앉았던 자리였다. 그는 이일 저일 챙기느라 바쁘다. 나야 놀러 왔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노동의 연장이며 큰 행사 중에 하나다. 엄선생이 잔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몇 번의 방석 주인의 바뀌었다. 그 빈자리 건너에 이란주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문시인 표현대로 삶창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건설현장의 이주노동자 문제는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내 머리와 가슴이 다르게 반응을 한다. 때로는 피를 나눈 동포로, 같이 고생하는 노동자로, 때로는 일자리를 뺏어가는 적으로, 빨리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할 불법체류자로. 내가 너무 솔직한가, 아직 덜돼서 그런가? 꼭 이주노동자가 아니더라고 그런 감정은 사람들 사이에 항상 있는 것인가? 아쉽게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나는 한자리에 앉으면 잘 옮기지 않는다. 방광이 제발 비어 달라고 애걸을 할 때까지 말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리라.
이번에 책을 낸 홍선생은 있으리라 생각을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야근하나? 홍세라씨도 당연히 와 있겠지 했는데, 그 양반도 야근하는 모양이다. 오기 전에 문자라도 보낼까 했는데 깜빡 잊었다. 최종천시인이 오셨다. 모두 인천작가회의 회원들이다. 삶창에서는 처음 뵌 것 같다. 인천에서는 종종 뵙기는 했지만. 역시 같은 건설 일을 하는 처지니 만나자마자 일 이야기를 했다. 불경기에 일하고 있는가 묻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알곤 엑스레이 용접을 하신다니 시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쇠도 잘 녹이신다. 근래 인천의 복잡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하시다 말을 접는다. 선배의 한숨을 쉬는 모습이 현실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재작년이 되어버린 을왕리에 갔을 여름이 생각난다. 온통 주변을 붉게 물들게 했던 낙조를 보면서 술을 마시던 그때가, 작가들이 모두 꽤 취해 있었다. 과거는 뒤로만 가고 낙조는 거두어지고 없으니 언제 또 그런 날이 온단 말인가. 그때 그 식구들을 본지가 해를 넘긴 만큼 길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뒤에 인천작가회의 소속의 이설야선생도 있었다. 인사를 미처 나누지 못한 채 오고 말았다. 파장을 하고 나왔을 때 아는 척하려고 갔는데, 긴 황색 부츠를 신느라 허리를 굽히고 있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야 했다.
맨 처음 오셨을, 그래서 탁자 끝 구석에 앉아 계셨던 이인휘 형으로부터 시작된 인사가 대각으로 박일환선생님까지 왔을 때가 시간상 중간쯤이었을 게다. 각기 다른 삶들이 한곳으로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다시 시간이 가면서 입가심으로 귤이 나올 때야 시간이 늦었음을 알고 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갈 사람은 가고 더할 사람은 더해야 했다. 길에서 아쉬움을 달래서 10여 분을 이야기 나누며 서 있다가 대부분 2차로 몰려갔다. 가는 사람 중에 오시인의 꽁지머리가 보였다. 오시인 오늘 늦게까지 마실 게 분명하다. 오시인, 오시인, 오시인, 그는 시인이다. 시대를 간다는 것은 자기 삶을 짊어지고 길을 가는 것이라면, 내 보따리에는 소설을 가득 담고 싶은데 현장에서 일한 공수를 기록하는 공책만 채워지고 있다. 오시인 등에 진 보따리는 무엇으로 차 있을까? 꽁지머리와 곧게 편 허리, 늘 집중하는 이야기, 내 전태일 문학상의 동기며 친애하는 그가 저기 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 하는 나와 부천 일행은 따로 떨어졌다. 골목길 사거리로 왔을 때, 세 사람을 마주 보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가로등으로 비친 그림자가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 전에 언제 부천에서 만나 한잔하기로 다짐을 했다. 신길역으로 가는 길에 민주노총 건물을 보고 서 있는데 서산에서 올라온 친구가 가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하며 산재당한 이야기를 나누며 신길역으로 갔다. 거의 밤 11시가 다 되었다.
집에 와보니 처가 아기 옷을 만든다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처도 끙끙거리며 재단을 하고 있었다. 근래 요양소에 일을 다니는데 피곤하지 않은가 보다.

모쪼록 삶창과 그외의 식구들 올해 건강하시고 하는 일 잘 되기를 기원한다.

내가 왜 이런 글을 쓰지? 사진사는 사진을 찍고 작가는 글로 남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되네. 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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