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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개, 개떼들
 최경주  | 2004·08·24 22:31 | HIT : 5,008 | VOTE : 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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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새벽에 여느 때처럼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기도 용인에 있는 내 동료들은 다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용인 동백지구에서는 삼 일째 현장을 막고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부천 한 귀퉁이 빌라에서 아직 의식이 덜 깬 몸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옷을 벗고 찬물을 끼얹을 때였다. 평온한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아침을 하고, 밤늦게 까지 일을 한 처는 아이들과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장마 비와 더위가 번갈아오고, 창밖의 무화과 나뭇잎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생동감 무성한 새벽이었다. 난 밤새 더위에 후질근한 더위에 시달린 열에 푹 잠긴 어깨에 찬물을 끼얹고 머리에 비누칠을 했다. 한여름의 장마 비가 새벽부터 쏟아 부은 후였다. 새벽의 풍부한 물 기운이 더위와 함께 온 집안에 넘실되고 있었다.
그 즈음 서울을 가로 질러 용인 동백지구에서는 건설연맹 몸이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방송차를 따라 움직였다. 차 지붕에 기다란 나팔 마이크를 네 개를 달고, 차 옆에는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이라고 시트지로 글자를 새겨 놓았다.
경기도 위원장은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곧 비를 뿌릴 것 같았다. 위원장 뒤로 조합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삼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머리에는 빨간 띠를 매고 빨간 조끼에 등 뒤에는 건설연맹 로고가 그려진 선봉대 조끼를 입은 조합원들이 삼삼오오 동네 어귀 삼거리로 줄을 이어 갔다. 대오 한쪽에는 이른 새벽부터 지원 나온 연대동지들이 일상이야기를 나누며 삼거리 길을 막을 장소로 줄지어 갔다. 그들 위로 구름이 서서히 비를 쏟아 부울 시기만을 기다린 채 동백지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경찰들도 대오가 오는 것을 보고 열을 추스르기 시작을 했다. 지휘자는 대오가 전날보다 작아진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작전을 펼칠 때까지 비가 오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빗속에 싸움을 하면 사고도 나지만, 여러모로 번거롭고 부하들이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벌써 삼일 째, 밖에서 이게 뭔가 싶었다.
파업대오가 집회를 하고 있는 뒤쪽에는 흐린 구름 아래로 몇 개의 현장이 보이고 타워가 곳곳에 세워져 낮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현장들 사이로 들어가는 길 따라 현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붉은 현수막이 여러 가로로 설치되어 있었고, 쇠파이프로 짠 그럴듯한 연단이 세워져 있었다. 연단 앞에는 사람들이 세워 논 차들이 줄지어 서있고 연단 뒤쪽 왼편에 텐트 세 동이 쳐있었다. 텐트와 마주보고 있는 현장은 H건설 있었다.
사실 나는 동백지구에서 연대단위와 함께 집회를 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시간에 그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을. 몇 번 파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연대 요청이 왔을 때도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구나! 정도였다. 사실 내 집에서 그곳까지는 작은 거리가 아니었다. 서울을 가로질러 새벽 6시까지 가려면 대중교통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예 엄두를 못 냈기에 무관심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차가 없었다. 조합에 그 시간에 함께 갈 승용차가 없었던 것이다.
용인동백지구에서는 경기도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며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꾼들의 차를 막기 위해 일정한 대오를 형성 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간밤의 피로가 남은 노곤한 몸임에 불구하고 빗물 흐르는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반대편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 6시경이었다. 대오는 대략 60여명정도.
두 대오가 마주 보며 손이 닿을 정도로 접근을 하자 경찰 지휘관은 연행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경찰들은 움직임이 서둘러지고, 경찰을 바라보던 경기도 위원장은 전날과는 다른 경찰의 행동을 보고 혹시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대우 옆에 빠져있는 투쟁위원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경찰의 움직임이 위원장의 생각보다 조금 빨리 움직였다.
경기도 조합원들이 연행되기 직전에 나는 좁은 화장실에서 몸을 대충 헹군 훈에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리를 털며 이빨을 닦았다. 이빨을 헹구고 칫솔을 닦고 수건을 목에 걸고 물기 묻은 발로 화장실을 나올 때 쯤 동백지구는 그런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복장을 갖춘 경찰들이 현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은 지 삼일 째 연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투쟁위원장이 위원장을 보고 짐짓 뭔가 말을 하려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같은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뭔가 조치를 내려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조합원을 밀고 들어와 몸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켜고 다른 책임자들에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불확실에 뭔가가 확신에 생기지 않았다. 잠깐 망설일 때, ‘연행이다’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경찰이 기습적으로 조합원들을 연행을 시작했다. 경찰을 재빠르게 대오를 둘러싸고 무더기로 연행을 시작한 것이다. 경찰은 방패로 밀고나오며 대오를 둘러싸자 대립하고 있던 질서가 벽돌 무너지듯 했다. 욕설이 오고가고, 고함소리, 항의하는 소리, 명령하는 소리, 기합소리가 일순간에 섞이었다.
경기도 위원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원장을 세 명의 경찰이 둘러쌓고 연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일어난 일에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에는 조합원들이 격렬하게 연행되고 있었고, 연행되면 안 되는 다른 지역 동지들의 모습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그의 팔과 허리를 젊은 경찰들의 손이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연행에 항의하던 조합원 몇몇이 어깨를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이 경찰들의 손을 잡고 억세게 벗겨냈다. 잠깐 이지만 나이든 조합원들의 격렬한 몸싸움이었다. ‘위원장 뒤로 빠져’, 백발이 허연 S건설 목수 팀장 이씨가 경찰과 엉키며 다른 조합원들에게 소리쳤다. 경기도 위원장은 잠깐 틈을 이용해 뒤로 빠져 왼쪽 고랑을 건넜다. 그때 경기도 대의원 강목수도 몸을 빼내 위원장을 따라 고랑을 건너뛰었다. 그의 왼발이 발목까지 고랑 진흙에 빠졌다. 그는 질척거리는 진탕을 뛰어가 위원장 팔을 끼고 텐트가 있는 곳으로 빠져 나왔다.
삼거리에는 지역 위원장이 경기도 위원장 외에, 인천, 경기서부 위원장까지 둘이 더 있었다. 그 중 서부 위원장은 수배 상태였다. 잠깐 사이에 몸싸움으로 인천과 경기서부 위원장은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경기도 위원장은 어처구니 없는 모습으로 조합원들이 연행되는 것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끝나가고 있을 때, 내가 집을 나섰다. 동료들은 닭장차에 실려 용인경찰서로 끌려가고 있었다. 더구나 연대를 하려고 함께 있었던 수배자들도 함께 무리 속에 포함되었다. 연행된 사람이 총 52명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었겠지만.

중부운수 종점에서 버스에 올라타 항상 내가 앉는 뒤 자리에 가서 느긋하게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있었다. 중부운수 버스는 종점이래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두어 정류장 지나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서가야 한다.
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려고 하니, 전화기의 액정에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배터리가 떨어진 것이다. 전날 저녁에 배터리의 표시가 가물가물하여 이럴 일에 대비하여 예비로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기 배터리가 다 되어 먹통이 되어 답답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경기도 위원장이었을 것이다. 연대 요청을 해야 하는데, 전화가 되지 않다니. 배터리를 갈아 끼우니 전기가 들어오고 대략 7시를 가리켰다. 버스가 신정동을 빠져나와 목동 오거리로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경기도 위원장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하다니’ 무슨 회의가 있을 때나 통화를 하던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온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사고인 것이다.
전화인 즉은 새벽 집회도중 52명이 연행되었다는 것이다. 연대가 필요하니 급히 동백으로 내려와 달라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긴장되어 있었다. 그 전화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모두 같은 이야기였다. 연행사건은 발생 직 후 파발마처럼 전국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 앞쪽에서는 할머니 한 분과 운전수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국민을 뭐로 아는 거야? 밥통보다 못한 시장 같으니. 도대체 어느 인간이 시장을 뽑았어? 뭐라고 운전수양반 말이면 다야! 당신들도 한 통속이야. 버스 요금 올리려고 시와 회사 노조가 짜고 친 것 아냐! 아니라고. 왜 수십 년을 쓴 번호를 바꾸고 지랄이야. 세 자리도 어려운데 네 자리에다가 비슷비슷해서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이걸 탁상행정이라고는 거야. 버스를 쳐다만 봤지 타보지 않은 족속들이 무슨 버스 정책을 편다고 해. 어느 날 갑자기 뿌리 채 바꾸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해도 이보다 잘하겠다. 망할 놈의 관료들 같으니. 누구를 위한 시장이고 정책이야. 늙은이들 다 걸어 다니란 말이야! 뭐야! 이놈의 정부는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전혀 신경을 안 써,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한단 말이야. 이게 무슨 시민을 대표하는 시야.”
할머니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14일 지났건만 아직도 번호가 정확하게 구분이 안 갔다. 내가 탈 수 있는 번호 외우기도 어렵거니와 노선까지 변해 가끔 버스를 잘못 탔다. 카드 찍는 법도 바뀌고, 색도 바뀌고, 무엇보다 우리 사무실까지 이사를 하는 바람에 6년간 오간 길과 버스가 모두 바뀐 것이다.
여러 생각을 하다가 두어 정류장을 지나쳐 대방역까지 가고 말았다. 마음은 바쁜데 버스까지 헷갈린 것이다. 대방역에서 내려 우신초등학교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여의도 가는 길로 돌아가는데 운송노조 위원장을 만났다.
“어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복잡한 아침에, 나를 향해오는 많은 사람들 틈에 낯익은 목소리와 얼굴이 눈에 쏙 들어왔다. 검은 가방을 들고 비쩍 마른 몸이 빠르게 다가왔다. 운송위원장이 걸걸한 목소리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으며 급하게 물었다.
“사무실에요.”
“전화 받았어? 동백지구에서 죄 연행되었다며.”
항상 단순 명료한 시원시원한 말투다. 동백소식을 운송위원장도 알고 있었다. 출근하는 주변 사람들은 세상에 무슨 일 일어났든 상관없다는 투로 대방역 입구로 빨려 들어가 듯 잘도 들어갔다.
“아까 전화 받았어요. 그래서 사무실에 들러 사람들하고 내려가 보려고요. 위원장님도 동백지구에 가시는 건가요?”
“아니, 우리도 다른 곳에서 파업하는데 난 그곳에 가는 거야. 나도 급해. 난 나중에 가지. 지금 차 시간 때문에 빨리 가야 돼. 나중에 보자고.”
레미콘노조는 전국에 걸쳐 파업이 돌아가면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근래에는 덤프트럭까지 운송노조에 가입하고 있었다. 운송위장은 대부분을 길바닥에서 먹고 잔다. 그는 잰걸음으로 지나치며 빠르게 말을 했다. 운송위원장의 시원스런 발걸음을 보면서 나도 버스를 타기위해 부리나케 서둘렀다. 조합에 들어와 보니, 역시 투쟁속보 팩스가 들어와 있었다. 오전 10시까지 용인 경찰서 항의투쟁과 오후 1시 규탄집회에 결합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2

서울조합에서는 14일 오후에 4명이 내려왔다. 1시에 연행에 대한 규탄집회를 하기로 했는데, 면회를 간 대오가 늦게 오는 바람에 3시쯤에 간단한 집회를 했다. 2사람은 저녁 무렵 올라가고 나와 조합원 한명이 남아 하룻밤을 지냈다. 텐트에는 연대 나온 전국의 조합원들이 술렁거렸고, 정작 주인들은 그날 밤 경찰서에서 보냈다. 부산, 대구, 대전, 전북, 천안, 경기서부, 인천, 경기 중부, 서울에서 작게는 한둘에서 서넛씩 모였다. 대략 모여 집회를 하다 보니 그것도 경기도 조합원까지 50여명은 되었다. 그 힘이 있어서 그런지 오후 늦게 꿈쩍도 하지 않던 회사에서 교섭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집회를 마치고 반수 정도는 지역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정신없던 하루가 지난 것이다.
7월 15일 새벽 5시 반쯤에 일어나 동백지구 들어오는 삼거리까지 선전전을 나갔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신 동료들은 아직 술이 덜 깼었을 것이다. 길 따라 길게 늘어서며 방송 차는 선전연설을 하고 나머지 대오는 박수를 치며 구호를 외쳤다. 대게 여덟 자로 된 구호였다. 박수를 치면서 말을 맞추어 외쳐댔다. 선전전 중에 장마답게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준비된 우비가 한사람씩 돌려지고 구호는 이어졌다.
숱한 승용차가 들어와서는 타워가 즐비한 현장으로 들어갔으나 줄지어 다시 돌아 나왔다. 비가 와서 일을 못하는 것이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선전에 경찰은 오지 않았다. 이 길을 전날까지 삼 일간 조합원들이 통제를 했던 곳이다. 결국 52명 연행이란 사태를 발생시키고 말았지만.
오전에 선전전을 마치고 경기도 본부에서 지원 나온 단체들과 주먹밥을 해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주먹밥이었다. 소금과 깨와 야채를 잘게 썰어 비벼 주먹보다 조금 크게 뭉친 밥 덩어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휴식시간이었다. 휴식을 하는 동안 현장팀장들과 조합간부들이 모여 교섭 준비회의를 하였다. 대표였던 몇 몇 팀장은 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므로 대신 나온 사람도 몇 되었다.
지원 나온 다른 이들은 경찰서 면회를 가기위해 차를 나누어 타고 동백지구를 빠져나갔다. 연행자들은 네 개 지역 경찰서에 나누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수원남부경찰서, 수원중부경찰서, 화성경찰서, 용인경찰서 등이다. 나머지 조합원들은 현장 파업선전을 떠났고 텐트에 남은 사람은 딱 둘이었다. 나와 동두천 경기도 지부장이다.
텐트 양 옆 배수로인 고랑에서 흙탕물이 전날보다 불어났다. 오전 10쯤에는 물이 불어 근처에 세워둔 차바퀴 위까지 물이 불었다. 비가 계속 내리자 텐트 뒤 현장에서 굴삭기가 오전 내내 고랑을 넓혔다. 고랑이 넓어지니 한결 흙탕물의 흐름이 완만해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텐트 여기저기 물이 차 쳐지는 텐트 쳐지자, 지부장은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천정을 들어 올려 빗물을 쏟아내는 일을 했다. 나는 달리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무엇을 할까 하려다가 기가 막힌 일 하나를 찾아냈다. 그곳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파리가 많았던 것이다. 나는 곧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기 시작했다.
파업 현장에서 파리를 잡다니, 허긴 아무리 파업 현장이라도 매 시간 마다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니, 일이 없으면 파리라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부경찰서에는 한바탕 난리가 나고 있었다. 말이 면담이지 항의방문이었다. 남부경찰서는 전날 저녁에 면회를 갔다가 9시 이후에 왔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거의 전부가 지역에서 지원 나온 조합원들인데다 수배자가 전부 그곳에 있었다. 전날 다른 경찰서는 면회를 다 했는데 그곳만 유독 면회를 시켜주지 않아서 감정이 있었다. 들리는 이야기로 수원 남부경찰서에는 인권에 문제가 있는 경찰서로 알려져 있었다. 날이 새자마자 첫 일상 활동으로 연대 나온 동료들이 나만 빼고 전부 그곳으로 갔다. 수원 남부경찰서는 조사 과정에서 연행자들에게 수갑을 채우며 조사를 하고 면회를 시켜주어 면회자들이 물통을 집어 던지며 면회를 거부하고 강력하게 안팎에서 항의를 하였다. 결국 인권위에 고발하겠다는 항의와 투쟁으로 수갑을 풀고 면회를 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은 바로 이 일상 속에 투쟁이 모여 세상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진리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죄 아닌 죄를 뒤집어쓰고 수배와 연행이 되었다면 그것만큼 분노할 일이 또 있을까? 함께 싸워도 시원찮을 판에 파리나 잡고 있었으니, 그 때 동지들이 혹 이글을 본다면 아량으로 용서해주길 바란다.
텐트 안에는 그야 말로 파리 세상 이었다. 아무 곳에나 잘 붙는 특별한 발을 가진 파리는 텐트 천정에 텐트에 새겨진 문양처럼 한 점이 되어 나를 희롱했다. 그들은 감히 인간을 희롱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경건한 시간이 된 것이다. 거의 학살 수준의 파리잡기가 시작되었다. 인간의 무료함이 그들에게 텐트 안이 공동묘지로 변한 것이다. 거의 이십 여분의 투쟁 끝에 파리 때는 숨거나 희생되었다. 회의와 숙소로 쓰는 텐트는 정리되었고, 다음 내 사냥터는 갖가지 짐을 쌓아둔 텐트로 옮겨갔다. 그곳 역시 이십 여분의 사냥으로 파리 묘지가 되었다. 내가 사용한 파리채는 빨간 망에 한쪽 끝에는 톱니가 열댓께 있는 것이었다. 그 톱니의 용도를 몰랐는데, 옮겨와서 알 수 있었다. 파리를 때리면 떨어지면 그 톱니로 콕 찍으면 파리채에 찍혀 올라왔다.
그 즈음 지부장은 민주노총 지역본부에서 지원 나온 간부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면담이 끝나야 예정대로 면회를 갈 수 있었다. 결국 나머지 시간도 마지막 남은 텐트의 파리 사냥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세 번째 텐트는 정말 파리가 많았다. 음식과 쓰레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파리가 많은 만큼 잡기는 쉽지가 않았다. 좁은 텐트 안에 빈 그릇과 주방기구, 기구를 얹어 놓은 탁자가 있어 파리채를 휘두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나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으나 성과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했나? 난 맥이 풀려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비가 오는 고랑에 소변을 보고 비 오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파리들도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맑은 날인데, 비는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물품을 쌓아둔 텐트로 건너가니 그곳에 낯선 사람이 서있었다. 나이는 50세 전후, 작은 키에 허리가 굵은 사내였다. 손에는 검은 비닐이 들려 있었다.
“동백지구에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예. 비가 와서요. 오늘 돈 받으러 왔다가, 비가 와서, 잠깐 텐트에서 버스 기다린다는 것이, 에구 그만, 비 오는 것 구경하다가 차를 놓쳐 버렸네요. 한 시간에 한번 씩 오는 건데. 언제 또 기다려.”
“억양이, 중국에서 오셨나 봐요? 이 파리들, 잡아도 끝이 없네.”
“네. 전기 일을 했는데, 일이 잘 안된다고 그만두라고 해서, 몇 칠 신갈에 있다가, 오늘 돈 받으러 와서 돌아가는 길에 설비 창고에 들렀더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을 할 거라고 그때 연락한번 주라네요.”
“전기 일하면서 얼마 받아요?”
“육만 오천 원.”
“맞아요. 그 정도 될 거예요. 설비들이 다른 직종에 비해 좀 작지요.”
“본래는 목수를 했는데, 허리를 다쳐서. 덜 힘든 일을 해요.”
“혼자 사세요?”
“예, 혼자 나왔어요.”
“이거 무슨 천막인지 아시죠?”
“파업한다고. 본토에서는 파업하면 큰일 납니다.”
“거기야 사회주의니까 그렇죠.”
나는 건설업체에 대한 부당성을 죽 이야기 했지만, 그는 말을 듣기만 했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것이리라. 건설업체에서 일을 하는 대부분의 중국동포들은 불법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입장을 밝힐 처지가 아닌 것이 당연하다. 내가 많은 말을 했지만, 하고 나니 허탈했다. 그가 대꾸를 안 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말들이 부정과 부정으로 이어지는, 이 사회에 대한 어두운 면을 이야기 한 것 이니, 좋은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얼마 후 비가 그치자 동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시장을 갔던 여성 동지와 선전을 나갔던 동지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조직가들은 점심을 준비하거나 간밤에 불어댄 바람에 기울어진 현수막들은 손보고 걸레질에 청소를 하였다.
곧 나와 지부장은 면회를 떠났다. 면회를 갈 곳 중에 남부경찰서는 연대온 동료들이 떠났기 때문에 화성경찰서로 먼저 갔다. 지부장이 운전하여 화성경찰서까지 갔다. 화성경찰서에는 경기서부 현장팀장과 경기도 조합원들이 조사를 받고 이었다.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조사를 마치고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연행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었다. 우린 잠깐 이야기를 하고, 다시 수원 중부경찰서로 출발을 했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를 가까워 오고 있었다. 점심도 굶고 있었지만 문제는 1시에 텐트에서 대표자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참가하기 힘들게 되었다. 중부 경찰서에서 면회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가니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2시 반이었다.
긴 회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니 밤 8시 경 경찰서에서 풀려난 연행자들이 한 차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차씩 들어올 때마다 악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승합차에서 내리는 대부분의 나이든 노동자들이 환한 웃음에 입안에 하얀 이빨이 꽉 차 있었다. 가슴에 벅찬 감정을 억누른 모습이었다. 면회 때도 알아볼 수 있었지만 비로소 자신을 위한 싸움이 무엇인지 알고, 싸워 볼만한 것을 깨달은 얼굴들이었다.
남부 경찰서에서 마지막 연행자들이 도착하자, 연단에 불이 켜지고, 붉은 머리띠와 조끼를 돌려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와 두부, 저녁을 소란스럽게 먹다가 연단 앞으로 모여 줄을 서니, 백여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곧 마이크 소리가 들리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 본 다음 ‘동지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고 첫 운을 떼었다.
평생 허리 굽히며 일만한 노동자들이다. 현장을 가로막고 파업을 하다가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다니, 평소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파업은 현장과 별개의 사람들이 하는 과격한 행동들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새 자신들이 머리띠를 매고, 구호를 외치고, 붉은 조끼를 입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연행되어 유치장을 다녀오다니. 평소에는 남들이 대신 싸워서 부조리한 것들을 바꾸어 나가거니 했던 이들이다. ‘더러우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했는데, 자신이 집적 해본 것이다. 부딪쳐 본 것이다.
자신들에게 비참하게 들 씌워진 두려움, 공포에 대항하여 소리쳐보고, 싸워보고, 주장해보고, 가서는 안 되는 유치장에도 다녀오니, 절대 해서 안 되는 일 한 바퀴 돌고 오니, 자신의 가슴을 옥죄던 강박관념과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 오직 굳굳한 자신만 남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자의 소개로 두려움을 이긴 노동자들이 흰머리 날리며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하나씩 나와 투쟁소감을 말하였다. 14, 15일은 그들 개개인으로서 인생에 있어 뜻있는 날이 될 것이다. 나와 함께 남아있던 조합원은 서울로 올라오기 위하여 인천 조합원의 차를 타고 신갈로 나왔다. 생각보다 짧은 싸움이 되었다. 최소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올라오려니 했는데. 하지만 다 기분 좋고, 밝은 날은 아니었다. 아직 나오지 못한 동료들이 있었다. 수배자들이었다.
모두 6명이었는데, 안산 경찰서로 이송된다고 하였다. 지역에서 올라온 조합원들이 차를 타고 안산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한다며 안산경찰서로 출발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함께 가지 못하고 다음날 16일 오후 경찰서 항의 집회만 약속하고 신갈에서 헤어졌다.


3

7월 16일 오후, 아직 한반도 중부지방에 장마구름이 할 일이 더 있는 듯 주춤거리며 머물러 있었다. 구름은 서울을 꽉 채운 건물들을 아래에 두고 모였다 흩어지기를 되풀이하였며 간간히 비를 뿌렸다. 밀리는 차들에게 7월 장마는 세차장 안을 운행하 듯 비에 자주 씻겼다.
오후 6시 안산 경찰서에 집회가 있었다. 경기서부 동지들 연행에 대한 항의집회였다. 안산경찰서 까지는 1시간 이상이 걸린다. 집회는 6시니 조합에서 5시 전에는 떠나야 했으나 뭉그적거리다가 5시 이후에 집회장소로 떠났다.
영등포역까지 걸어가 1호선을 타고 금정역에서 안산행 전철로 갈아탔다. 거리로만 따지면 영등포역에서 천안을 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서울에서 안산이 가까이 느껴지긴 해도 실상 시간으로 따지면 가까운 곳이 아니다. 조합원들이 천안으로 일을 나가면 지방일이라고 하여, 숙식을 제공받지만, 안산 시화공단에 일을 나가면 수도권이라고 출퇴근을 해야 한다. 행정구역이 틀려서 그럴 것이다. 안산은 분명 수도권이고 천안은 도경계가 있는 충청지역이다.
전철은 몸통 안에 만화가 전문으로 나오는 신문을 보고 있는 나를 싣고 안산 종착역을 향해 부지런히 달렸다. 전철 안에는 만화뿐 아니라 다른 무료 신문을 몇 개보니 어느 덧 중앙역 근처까지 왔다. 신문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우리가 동지가 연행된 이야기보다는 다른 많은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52명이 연행되었는데, 뉴스거리로서 허접한 모양이다.
전철에서 내릴 때쯤에는 신문을 읽은 내용보다는 다른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신문이 무료라서 그렇기 보다는 연행된 서부 동지들 때문이었다. 연행되었다면 분명 몇몇은 구속이다. 건설 현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으로 조직사업을 했는데, 구속이라니. 이 모든 게 다 지난해 10월 1일 이후부터 일어난 일련의 공안사건의 계획 속에서 나온 일이다.
안산경찰서는 중앙역과 고잔역 중간에 있었다. 한 정거장 더 가느니, 중앙역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계속된 비로 중앙역 길 건너 상가와 뒤 주공아파트 단지는 검은 구름 낀 하늘로 어두침침했다. 안산 경찰서는 처음 길이라 이정표를 따라 걸어갔다. 지도에서 보기에는 가깝게 여겨졌는데 실제 거리는 꽤 멀었다. 큰 길을 두 개 쯤 지나간 것 갔다. 새로 생긴 도시답게 건물외벽이 깨끗하고, 도로가 넓었다. 보도블록을 새로 깔고 있는 곳도 있었다.
집회 장소만큼 찾기 쉬운 곳이 있을까? 반경 백여 미터 안에서는 확성기소리가 들린다. 안산 경찰서가 보이기도 전에 멀리 건물 밀집된 속에서 연설 소리가 들렸다. 안산경찰서는 안산시청 오른쪽에 붙어있었다. 서부 동지들이 안산경찰서 앞 차도 건너편에 있었다. 백 대오정도 되었다. 대부분 하얀 비옷을 입고 있었다. 집회대오에 들어가니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중간에 경기도 조합원도 다수 와 있었다. 노란 비옷을 입고, 등 뒤에서 악천후 수당에 대한 구호가 쓰여 있었다. 2003년 여름, 하루건너 비가 올 때 악천후 수당을 받고자 투쟁할 때맞춘 우의였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환영하는 뜻에서 굵은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펼치니 하얀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쳐 엷은 막을 형성하며 어지럽게 튄다.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몇 명 있었다. 명색이 동료들이 구속되는 판에 모양새 사납게 우산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사치스러운 생각이 들어 우산을 접었다. 그렇다고 비를 맞고 있다면 그것 또한 바보소리 들을게 뻔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대오 옆 건물 현관 입구 계단에 올라섰다. 현관 앞 또한 집회 인원으로 북적거렸는데, 그곳에 연맹 전 수석부위원장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가 인사를 하니, 말없이 인사를 받았다. 수석부위원장은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업에 연대하러온 서부 동지들이 연행되니 연대의 도움을 받은 경기도 조합원의 한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우려스런 생각이 들 것이다.
대오 중간에 인천 조직가들도 있었다. 인천 위원장도 연행되어 하룻밤 유치장에서 자고 나왔었다. 부위원장을 비롯한 몇몇 조직가들이다. 비오는 날에 집회는 분노도 무거워 진다. 발아래 흐르는 빗물과, 튀는 물방울, 가라앉은 기분, 분노와 짜증, 두 시간쯤 되는 집회 내내 서 있어야 한다.
집회를 마무리하는 연사로 경기서부 원로인 송 전위원장이 나왔다. 연배로 보면 지역노조 간부들 중 수석부위원장과 같이 건설지역 노조 1세대들이다. 오십을 넘긴 나이다. 이십년은 족히 넘게 활동을 했다. 건설노조 차원에서 보면 그런 연배가 십 명 내외다. 한 노조에서 노조 초창기부터 떠나지 않고 한자리에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는 것은 조합으로서는 큰 나무의 그늘과 같다. 후배 지도부가 뜻하지 않게 한 번에 잡혀가니, 부득이 나와 비가 오는 가운데 마이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비장한 각오와 결의가 넘친 송 전위원장의 투쟁사가 끝나고 집회는 마무리 되었다. 두꺼운 먹구름으로 날은 어두워졌지만 비는 잠시 멈추었다. 서로 헤어지기 위해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묻는데, 경기서부 간부들과 조합원들이 횡당보도를 건너 경찰서 정문 앞으로 몰려갔다. 정문에서의 몸싸움이 예견되었다. 나도 순간적으로 조합으로 돌아갈까 싸울까 망설이는데 보행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흐름에 쓸려 길을 건넜다.
전날 밤, 동백지구에서 연행자 석방 환송회가 열릴 시간, 몇몇 조합 간부들이 안산경찰서로 몰려와 안산경찰서로 이송된 연행자들에 대한 항의를 하였다. 안산경찰로서 지난 연말이후 소환장발부와 수배, 명동성당 텐트농성으로 이어진 문제를 해결될 시점에 있어 편하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송된 날부터 강력한 항의방문이 이어졌다.
서부간부들은 면회 신청을 하려고 했으나, 경찰들로서는 면회자들을 그대로 경찰서 안으로 들여 놓기를 골치아파하는 듯 했다. 그렇다고 연행자들을 면회 하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라는 게 궁색하기만 했다. 경찰 책임자는 다섯 명씩 면회를 시켜 주겠다고 줄을 세웠다. 마지못해 다섯줄로 줄을 서는데 사람들이 면회를 하겠다고 줄에 너도나도 서기 시작했다. 이에 경찰은 너무 많다고 수를 줄여줄 것을 요구했다. 어떤 근거로 그런 수 제한을 하는가하고 항의가 터졌다.
난감한 것은 경찰이었다. 불만이 터지고, 경찰서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경찰은 방패로 사람을 밀쳐내며 막았다. 다섯줄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방패에 마주서 비난과 항의가 난무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면회만 시켜주면 별일 없을 것 같았는데, 경찰은 달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때 카메라가 등장한 것이다. 경찰의 정보수집이나, 혹은 위협용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종종 분노를 촉발시키는 행위가 곧 사진기다. 사진기를 똑바로 들이 되어 노골적인 위협을 한다. ‘이 사진기에 증거 체증되면 구속이다. 가만있어라!’라고 공갈을 치다니, 경찰의 준엄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사진 찍지마!”
사진기가 분노의 목표가 되었다. 사진을 찍는 직원에게 물병이 날아가고 막으려는 경찰과 몸싸움이 붙었다. 욕설이 오가고, 화를 주체 못한 나이든 조합원이 경찰 담을 올라타고 넘었다. 그쪽으로 경찰이 몰려가니 반대쪽으로 담을 넘어 사진기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정문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쉽게 끝날 상황이 아니어서 경찰은 본보기로 경찰서 안에 들어간 조합원들을 보란 듯이 서넛이 어깨와 허리를 잡고 건물 안으로 연행을 했다. 위협, 공포 조장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자본과 경찰의 저급한 본질이다. ‘봐라 말이야, 너희들 다 잡아간다 말이다. 우린 순경이야. 순경!’ 위협은 군사, 독재 정치의 부산물이다. 불신을 키워 법과 제도를 강화시키고, 법을 지키기 위해 더욱 사람들을 위협하고, 범법자를 키워나가는, 높은 법테두리 안에서 온갖 부정으로 썩어 가면 외부 비판을 피해 안주하려는 봉건시대 제왕식의 통치 방식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불쌍한 한국인 다수가 아직도 억압에 오염되어 있다니, 한반도는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아직 봉건을 벗어나지 못하고 불안한 모습으로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의 호랑이처럼 매달려 있다. 누가 이 안타까운 호랑이를 구할 것인가?
연행되었다고 소리를 지르고, 비명소리가 울리고 경찰서 정문은 갈수록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 나갔다. 검은 헬멧과 방패가 비에 맞아 반짝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고직하게 보였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그들은 긴 봉과 방패를 칼처럼 휘두르며 비무장한 사람들에게 덤벼들 것 이다.
좀처럼 분노는 삭혀지지 않았다. 항의가 빗발치고, 방패사이를 벌이려는 노력들이 되풀이 되었다. 몇 명의 경찰들이 끌려나왔다. 면회를 신청하려던 조합원들이 완강한 방패를 뚫고 두어 명이 경찰서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정문이 뚫리지 않기 위해 경찰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촘촘한 대오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다.
어디서 나왔는지 물병이 날아다니고 급기야 울타리 너머에 있던 사진사가 누구에게인가 잡혀 옆으로 고꾸라졌다. 상황에 대한 정리는 구속자를 면회시켜 주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는데 경찰은 거부하고 있었다.
“면회를 시켜달란 말이야! 죄 없이 갇혀있는 사람들을.”
조합원들은 검거된 연행자에 대한 무죄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찰들에 대해 면회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외쳤다. 결국 면회자들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자 경찰 책임자들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면회를 시켜 주기로 한 것이다.
경찰의 의무와 노동자의 의무, 구속자들, 수배자들, 집회와 수많은 논리를 담은 연설, 연대나 온 사람들, 경찰서 앞에서 방패에 머리를 박고 싸우는 사람들, 막기만 하는 경찰들, 말없이 스쳐 지나가는 차들, 구경꾼들, 울부짖는 사람들, 비에 젖은 거리와 건물들이 묵묵히 서있고, 시간은 2004년 7월 16일 오후 7시를 넘기고 있었다. 권력자들이 불안스럽고, 그들의 사고가 불확실하며, 불분명한 정체성으로 분명 이사회에는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안타까운 위기의 호랑이며, 그 호랑이에 대한 존재에 내 삶도 묻혀 있었다.

다음날 연맹 게시판에 보니 전날의 안산경찰서 싸움과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는 서부위원장의 인사말이 담겨져 떠 올려져 있었다. 이토록 당당한 죄인이 있는가!

4

건설 현장 울타리는 2층 높이쯤 된다. 대충 일층을 삼 미터로 계산하면 육 미터쯤 된다.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밖에서 지나다니며 보는 것과는 다르다. 안에서 일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내가 건설현장에 처음 일을 하려고 들어갔을 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83년 경 서교동에 있는 서교호텔 별관이었다.
1층 로비에 각 직종 건축자재가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었고, 듣도 보도 못한 여러 공정들이 있었다. 노가다 하면 벽돌과 미장, 목수, 철근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전기, 배관, 경량, 철골 용접 등 이들이 모두 노가다라고 한 묶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한 일은 닥트였다. 배우러가서야 ‘이런 게 있었구나!’를 알았다. 그 갖가지 공정이 어우러져 지지고 볶으며 건물을 올리는 세밀한 건설현장이 내 삶의 전부가 된 것이다.
하루 일당 사천 오백 원을 받았다. 중동 붐이 끝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아침 7시 반에서 저녁 6시까지 일을 했다. 여름에는 삼십분 정도 길게 일을 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다섯 시 반이면 일을 마쳤다. 작업복도, 안전화도, 안전모는 물론이고 장갑까지 내 손으로 사서 일을 했다. 지금도 장갑은 개인이 준비를 해야 한다.
건설현장에 안전 문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작업자들이 항시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인간의 권리는 그 나라의 힘과 비례한다고 했던가!’ 인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우리 형편은 그런 것 같다. 필리핀 건설노동자들이 하루 사망하는 숫자를 가지고 사회에 이슈화에 성공을 했다고 한다. 우리도 비슷한 처지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하루 두 명이 죽어나가는데 별로 무관심하다.
‘한국인이 안전 불감증이 중증이라 그런가? 불쌍한 한국인’ 정말 그런가!

오늘 어느 누군가 노동자 두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달리 말을 해보자! 오늘 두 부인이 과부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두 가정의 어린이가 아버지를 건설현장에서 산재사고로 잃어버릴 것이다. 혹은 두 어머니가 자식을 잃은 날이기도 하다. 두 형제가 자신의 형이나 아우와 사고로 이별을 했을 것이다. 두 사고자가 병원에 시신이 되어 안장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고사에 대한 조문 연락이 갈 것이다. 두 구의 시신이 화장터로 갈 것이며, 혹은 매장이 될 것이다. 어제는 누구였으면 오늘은 누구였을까? 내일은 누구 차례일까?
왜? 현장에 안전사고로 하루에 두 명씩 일년에 육백 명 이상씩 죽어 나가는 것일까? 십년이면 육천 명이다. 왜? 날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해마다 같은 재난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똑같은 가해자와 똑같은 피해자 그럼 도대체 두 명이 죽는다면 다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내가 아는 한 사고는 대게 두 가지의 중첩된 결과에서 나온다. 과로와 안전관리에 대한 미비가 두 축일 것이다. 그 두 가지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중첩된 하도급이다. 하도급이 중첩되다보니 안전시설에 투자할 돈도 부족하거니와 하도급이 한 단계씩 떨어질 때마다 노동력을 늘려 이윤을 남겨야 한다. 노동 강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아진다.
이 악질적인 착취를 근 백년을 해온 것이다.
2004년 8월 20일 오늘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누군지 모르지만, 머리가 부셔졌거나, 허리가 꺾여 죽었을 것이다. 아니라고? 물론 아닐 수 있다. 그럼 내일 넷이 죽는다. 아닐 수 있다고, 그것 또한 인정을 한다. 아닐 수 있다. 그럼 그 다음날 여섯이 죽어야 한다. 왜냐 하면 다시 말하지만 일년에 평균 육백 명 이상 사망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을 합니까?”
“조직갑니다.”
“조직가요? 하는 일이 뭡니까?”
“건설현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거죠.”
“이를테면?”
“현장에 노동조합을 알리는 일도하고, 그러니까 교육도하고, 안전시설 확인도 하고, 복지에 관한 거, 또 현장에 생각보다 체불이 많거든요. 그런데 단순히 돈을 못 받은 것이 아니고, 불법 하도급 상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법으로 해결이 잘 안되지요. 워낙에 현장 자체가 법의 사각지대라 그렇습니다. 또 산재가 발생을 해도 산재처리를 잘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 거 처리도 하고, 대게 문제는 건설현장 관리자와 실무 협의하여 통해 고쳐 나가려고 노력하지요.”
“그것뿐인가요?”
“일상적인 것 외에, 전반적인 구조적인 문제를 모아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근로시간 문제라든가, 하도급문제, 휴일에도 일해야 돈을 받는 문제 등, 흔히 말하는 제도투쟁이지요.”
“현장에 원래 조직가가 있었나요?”
“생긴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1999년 후로 생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럼 현장의 조직가가 있기 전에는 현장 문제를 어디서 해결했나요?”
“지역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1988년 노동자 대투쟁 때 생겼습니다. 그때는 사무실 운영하기조차 버거웠습니다. 단위노조와 달리 볼펜 한 자루 전부 조합비로 해결했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조직을 조금씩 키워 오다가 1998년을 기점으로 전국에 건설노조가 양적으로 급팽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노조가 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늘어난 조합원을 중심으로 어려운 시기, 최악의 조건을 들고 현장 안에서 투쟁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때 현장 밖이 아니라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는 전문 활동가가 필요했는데, 바로 지금의 조직가들 입니다.”
“건설업체로서는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이 현장 안에 생긴 셈이군요?”
“당연히 그렇겠죠. 현장 울타리 안에서는 거의 제왕처럼 현장을 굴려갔는데, 노조 활동가가 나타났으니 미칠 노릇이겠지요. 더구나 한국의 건설업은 비자금의 원천 아닙니까? 그만큼 비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일들이 상식처럼 벌어지는 곳인데, 감시자가 나타난 것이지요. 할 수만 있다면 죽이고 싶겠지요.”
“건설기업이 가만있었나요?”
“완강하게 거부는 안했습니다. 같은 건설연맹 안에 기업노조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같은 연맹 소속 지역노조가 현장 사업을 하는데 극구 반대할 처지가 못 됐지요. 또 현장 자체가 워낙에 법 테두리를 벗어난 불법 구조가 만연한 상태라 합법을 들고 들어가는 노동조합 활동가의 요구를 막무가내로 거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백 년 동안 누려오던 권리를 침해하려는데 기업 관리자들이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텐데요. 이를 테면 공안탄압이 있었다고 하던데?”
“어느 날, 기업이 칼을 뽑았죠. 짐작이긴 하지만요. 지난 해 2003년 10월 1일 우려하던 일이 터졌습니다.”
“국군의 날이군요.”
“그런가요? 그날 대전의 간부들이 새벽에 출근하는 길에 연행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구속적부심 검사를 위해 출두한 간부까지 7명이 구속이 되었습니다. 아마 기업의 반격이라면 그게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곧 천안 위원장과 부위원장 구속되었습니다. 다음은 경기 서부, 다음에 경기도에 소환장이 발부되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지금은 서부 집행 임원 세 사람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유는?”
“상습적 공갈협박에 금품갈취 입니다.”
“그때 신문에 그렇게 났었지요?”
“한겨레까지 났습니다. 이상하게 조선일보에는 안 났더군요. 이걸 보고 인지수사라고 하더군요.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은, 단지 범죄사실을 인지하고 수사를 하는 것이라 하더군요. 중요 사실은 전임비 였습니다. 공갈 협박으로 현장협약을 하여 전임비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협약이 뭐지요?”
“현장에 들어가 건설 시공사와 노동조합 간에 현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겠다는 노사간의 협약이지요.”
“협약을 하면서 공갈 협박을 했나요?”
“했다면 인지 수사가 아니었겠죠. 고발을 직접 했겠죠.”
“그래도 어떤 위협은 가하지 않았을까하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야당이 여당과 정치 협상을 할 때, 불리하면 국회 밖에서 집회를 열어 자기들의 주장을 국민들과 더불어 관찰하겠다고 대응하는데, 그걸 범죄 사실로 인지하고 수사를 합니까?”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당위성을 한마디로 한다면?”
“최소한 대한민국 건설 현장에서 하루 두 사람씩 죽어 가는데 이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노동부 역할이 아닙니까?”
“수천 수만이 죽어가는데 그들은 뭐했습니까? 오늘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현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은 그것뿐입니다.”
“끝으로 한마디?”
“언젠가 체불 때문에 노동부에 갔는데, 사장이 노무사를 데리고 나왔더군요. 그래 한마디 했습니다. ‘노무사 양반! 노무사로서 노동자처지도 사장처지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잘 좀 봐주시오’ 했더니, 자신은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말하데요. ‘저는 누굴 편들자고 나온 것이 아니라 진실을 가리고자 나왔습니다. 진실을’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진실 말인가요? 사용자? 당신의 진실은 돈 주는 사람 아닌가?’ 거 난감한 표정이란, 좀 심했죠. 굳이 그렇게 까지 말할 필요 없었는데. 솔직히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만 작작 물어 뜯어라! 망할놈의 개떼들 같으니’ 마음이 그랬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무사 말대로 진실입니다. 돈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건설현장이 건물을 올리는 곳이지, 자본의 이윤 때문에 무덤이 되서야 되겠습니까? 인지 수사요. 좋습니다. 누구를 위한 인지수사입니까? 묻고 싶습니다. 진정한 범죄자가 누구입니까? 하루 두 사람이 죽고 있는데,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에서 자본과, 조합 활동가 검찰경찰. 누가 범죄자 입니까? 바로 오늘 두 사람이 죽었는데, 주검을 앞에 두고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진실은 외친다고 거짓이 진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죽음을 방기하고, 죽음을 막는 것을 방해하는, 죽음을 조장하는 그게 바로 범죄입니다. 수사 대상이 틀렸습니다. 수사 대상은 바로 일년에 육백 명씩 죽음을 조장하는 노동부와 자본가가 아닙니까? 우린 더이상 뜯다 버리는 뼈다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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