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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광양이라? 그래 그곳에 광양제철소가 있지.
 최경주  | 2004·02·24 20:38 | HIT : 5,588 | VOTE : 261 |
1983년 겨울이었다. 바닷가의 그 엄청난 바람이란, 다 변했어도 그 바람은 아직도 여전 할 것이다. 광양만에 있는 광양제철소다. 내가 그 곳에서 일을 했을 때는 제철소가 한창 터를 닦고 있을 때였는데, 지금은 같은 연맹산하 노동조합이 있다.
83년 그해 겨울은 건설노동자로서 몹시 힘든 때였다. 2004년 불경기인 지금보다, 저 98년 구제금융 시기 보다 어려웠다. 세상을 나를 필요로 하는 현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울에 일이 없어 지방을 가야했다. 지방팀에 끼기 위해 점심 쉬는 시간을 이용해 일을 배워야했다. 혹독한 80년대 초였다. 어린 마음에 80년대가 되면 선진국에 들어가리란 정치구호 속에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정치구호란 그런 것임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18세부터 20대 중반까지, 구두쟁이에서 노가다라니. 그 청춘 한 대목이 광양만에 있었다.

80년대 초는 건설노동자가 엄청나게 배출해 냈던 중동붐이 오일쇼크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끝나는 시점이었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와, 박정희 대통령 암살. 광주항쟁과 하루에도 수백 명씩 김포공항에 중동의 건설노동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현장보다 사람이 넘쳐 났었나보다. 아무 현장에 들어가 무조건 일을 시켜 달라고 했었으니, 그래도 일을 잡기가 힘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나는 일을 잡지 못하고, 내가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해야 했다. 닥트와 비슷한 캔싱이란 일이었는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해 어려운 겨울을 보낸 곳이 광양 제철소였다. 그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삶을 여는 창 중 한 꼭지인 백학동 사람들의 무대가 그곳이라니,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글을 써본다.
금호도, 그곳은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 광영에서 차를 타고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섬이 있었다. 그 섬이 바로 지금의 광양 제철소였다. 삼 개월이었지만 그 현장의 몇 가지 잊을 수없는 장면들이 있다. 숙소는 광영에 있었고, 금호도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간혹 차비로 술을 마시고, 걸어 다니기도 했지만. 숙소에서 현장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나와 당시 형제와 다름없이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한 살 위의 친구 정씨가 있었다. 팀장으로는 이종사촌형이 있었고, - 그 형은 그 후 십년 쯤 지나 나를 현장에 놔두고 매정하게 자살을 했다. 삶은 그렇게 항상 기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 그 형 친구가 하나 더 있었다. 우리 팀은 넷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위생수도 파이프에 함석을 둘러싸는 캔싱이란 일이었다. 섬 입구에 독신자 아파트가 있었는데, 아파트에 물을 대기위한 배관을 끌기위해 땅 밑으로 판 긴 공동구가 있었다. 대략 열 가닥 쯤 되는 수도관이 그 긴 공동구 터널을 수백 미터의 아파트까지 이어져 있었다.
내가 속한 캔싱 사장은 나이가 오십 중반 쯤 되는 배가 불룩하고, 자신의 말로는 예전에는 돈을 꽤나 벌었다는 사람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일을 할 때는 그야말로 빈털터리 하청업자였다. 술을 즐겨하는 그 사장 위로 설비 업체가 있었다. 그 설비업체 위로 포항제철 건설사업부인가?하는 원청회사가 있었다. 포철에서 설비업체가 도급을 받아 우리 닥트 사장에게 하도급을 준 것이다. 사장은 참 좋았는데, 설비업체에서 월급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 체불 때문에 우리도 그만두고 올라왔지만.
우리 임금 뿐 아니라 숙소에 숙박비와 밥값도 잘 주지 않았다. 한번은 사장이 돈을 가지러 서울 간다고 오지 않았던 적이 있다. 지금처럼 손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연락도 되지 않았다. 화가 난 밥집 사장이 밥을 주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는 바람에 난처한 적이 있다. 굶으면서 일을 할 수 없었으니,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한 끼 정도 굶었었나,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당시 광양제철소 현장에 들어가려면 제철소에서 내주는 허가증이 있어야 했다. 그 허가증을 사장이 서둘러 내 주어야 하는데 사장이 자주 서울로 올라가는 관계로 우리는 개구멍으로 다니며 일을 하였다. 한번은 개구멍을 제철소 경비들이 막아, 담을 넘다가 경비에게 걸려 혼나고 되돌아 온 적이 있다. 지금 같으면 당장 때려 치고 올라왔을 테지만, 그때는 달리 올라올 방도가 없었다. 차비도 없었다. 다음날도 일을 하기위해 그 개구멍으로 들어가야 했다.

숙소가 있는 광영은 한창 발전을 위해 움트고 있었다. 우리 숙소는 구멍가게를 하는 집에서 하숙을 했고, 광영 그 동네에 호프집 몇 군데와 가게, 새로 지은 주택단지가 있는 작은 동네였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상당히 발전을 했으리라. 이른 아침 어둠속을 걸어 버스정류장까지 가면 버스가득 제철소로 들어가는 일꾼들이 붐볐다. 승용차가 드문 시절이었다. 제철소 직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규모가 있는 하청업체에서는 트럭에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것 같다.
으스스한 몸을 비비며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면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온다. 아마 다리에서 조금 지나면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멀리 동이 트기 전의 희뿌연 새벽이 안개가 강에서 올라와 다리 위에서 건들거리는 시간이었다. 아마 한 두어 달 후 정문이 제대로 생기고 들어가기가 힘들어졌을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김포공항에서 광양만 설계도를 가지고 나가던 사람이 걸렸다나? 어쨌다나?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출입이 엄해졌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들락거리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개구멍으로 다녔다. 현장으로 들어가면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볼 수없는 멋진 장면을 볼 수가 있다. 현장으로 걸어서 들어 갈쯤이면 동이 터 으스름한 아침이 시작된다. 굴곡진 모래더미가 멀리 바다 쪽으로 지평선 끝까지 펼쳐있다. 곳곳에 산더미 같은 모래와, 물웅덩이, 그리고 아침을 시작하는 중장비들이다.
모래 길을 따라 아파트 근처 공동구가 있는, 대충 합판을 얽어 만든 현장으로 갈 때 쯤, 길 옆에서 포크레인이 운동을 시작한다. 삽을 까딱 거리고, 바퀴를 돌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손을 굽혔다 폈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웅장한 삽을 쭉 펴고 아침 동트는 희고, 푸르고, 붉은 하늘을 가르며 빙빙 도는 모습은 중장비 기술자들 아니면 펼칠 수 없는 예술행위 그 자체였다. 운전수들이 자기 기술을 과시라도, 커다란 포크레인의 힘을 즐기려는 듯, 옆으로 지나가는 작은 일꾼들 머리위로 삽을 돌려댔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덩달아 거친 숨을 몰아쉬듯 색색 거렸다.

우리 넷 이외에 서울 돈암동 근처 미아리 어디에서 공업사를 운영 하다가 반장으로 내려온 노인이 있었다. 우리는 반장님이라고 불렀다. 후에 그 노인은 우리에게 캔싱을 하는 기술을 전수해 주고 서울로 올라갔다. 자신도 일이 워낙 없어 날일이라도 하려고 내려왔다고 했다.
현장에 도착하면 노인은 일을 분담시키고 자신은 제작을 했다. 우리는 노인이 재단을 해 논 함석 조각을 들고 점검구로 갔다. 장화를 챙겨 신고 물이 질퍽거리는 공동구 안으로 들어가 보온을 파이프를 감쌌다. 한쪽에서는 배관공들이 배관을 설치해 나가고, 그 다음에 보온공이 보온을 해 나가고 다음에 우리가 따라 가며 함으로 파이프를 둘둘 말았다. 용접부위는 수압을 봐야 하기에 빼 놓았다. 공동구 안에 들어가면 종일 전등을 끌고 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백열전등에 빛나는 유리 가루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두거나, 숨을 쉬어 다 마시던가, 둘 중에 하나였지만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점심때 쯤 현장으로 가서 아침에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숙소 아주머니가 음식을 푸짐하고 맛있게 해 도시락이긴 하지만 음식에는 불만이 없었다.

어두운 새벽에 나와, 어두운 밤에 들어가는 일을 반복하며 우리는 긴 겨울을 보냈다. 밤에는 숙소사장에게 부탁을 해서 안주를 마련해 만만한 소주를 사서 마시곤 했다. 그러다 성탄절이 왔다. 마음뿐인 성탄절이었다. 정씨와 나는 깡으로 소주 두 어병 마시고 놀이터를 가서 성탄절에 관한 노래와 당시 한 시대를 풍미한 산울림 등 젊은 그룹사운드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저 피만 뜨거웠던 청춘이었다. 보안등도 변변치 않아 골목골목이 어둡고, 막 생기기 시작한 호프집이나, 찻집은 밤새 불을 밝히고, 간간히 현장 노무자들이 어깨를 걸고 휘청거리며 숙소를 오고갔다. 치열할 것도, 삶의 전략도, 악다구니를 쓸 무엇도 없이, 그저 일을 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고,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자고, 또 일을 할 뿐이었다. 성탄절이란 다른 날보다 조금 기분을 내는 그런 날이었다.
그곳에서 여동생에게 몇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가끔 가족들이 그리웠다. 그런 날이면 잠은 오지 않고 몸을 뒤척이다 잠을 잔다. 일을 쉬는 날, 하숙집 뒤쪽에 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산길을 걷고 걸어 그 절을 찾아 갔었다. 절에 가면서 강이 하나 만났는데 섬진강이라는 말을 들었다. 맞을 것이다. 절에는 중년의 중과 나보다는 조금 어린 갓 스물이나 되었을 법한 여자아이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드는 생각이 아마 대처승이 아니었나 싶다. 여자는 설거지물을 마당에 신경질적으로 뿌리고 중년의 중은 고개를 끄떡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절은 아담하였다.

한번은 일을 마치고 너무도 술이 마시고 싶어 차비를 모아 정씨와 소주를 마셔버렸다. 술에 취해 흥이 나는 몸으로 긴 길을 걸어서 숙소로 왔다. 몇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길을 걸어오다니.
그 친구를 처음 만났던 곳은 조달청 공사장이었다. 현장 반장이 함석을 접는 방망이 기술의 대가가 온다고 말하더니 그 친구였다. 처음 현장에 온 정씨는 교련복을 입고 있었다. 깨끗한 얼굴에 훤칠한 키, 붉은 볼과 선한 눈과 우수에 젖은 깊은 눈동자가 같은 남자지만 한 눈에 호감이 갔다. 한 사 오년 현장을 함께 다녔나? 후에 그 친구는 집안의 도움으로 현장을 떠났다. 결혼과 함께.
그 친구는 지방의 명문 상고를 나왔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건설현장에 오기까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으로 자신은 어머니를 따라 갔고, 후에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 결국 몇 년 후 아버지 집안에서 그를 거두어 갔지만. 그 몇 년간의 그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직장 동료였고, 어려운 시절을 형제처럼 의지해 보냈다. 그 친구에게 방망이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 기술이란 딱 한가지였다.
“모든 동작을 크게 해, 누가 보더라도 일을 하는 것 같이 보이게 말이야.”
맞는 말이다. 프로는 그의 말대로 폼이 생명이었던 것이다.
“경주, 내가 죽으면 63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뿌려줘.”
그 말을 몇 번 하더니, 얼마 후에 결혼을 했다. 입이 한없이 벌어지는 얼굴로, 그의 큰 할아버지가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현장을 떠났다. 그가 건설현장의 노가다로 떠도는 것이 보기 언짢았던 모양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내 인생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항상 내가 결정을 했어야 했으니. 청계천의 시다에서 구둣일로, 다시 건설현장으로, 노조로. 누가 나를 걱정해 줄 것인가? 가난한 자의 친구는 고독뿐이다. 가진 것이 없으니, 걱정해 줄 무엇도 없었던 것이다. 잘 돼서 떠나는 것에 기쁨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되는 구나 싶은 것이다 .

광양제철소는 사하라 사막이었다. 야간작업을 할 때는 모래 더미 속에서 가끔 길을 잃어 버렸다. 내가 올라올 때까지 입구에서 깔짝대었을 뿐 건너편 끝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는 일을 나가는데 군인들이 현장에 돌아다녔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순시를 온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지뢰를 찾는다나, 도로 아래의 금속을 탐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오기로한 삼일 전부터 현장을 돌아다니며 청소만 했다. 결국 당일 날 청소한 것이 무색하게 잠깐 들렀다가 났다나, 아니면 안 왔다나, 우린 그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런 그 대통령이 검사에게 조사를 받는 시대가 되었다니.
봄이 올 무렵 우린 체불이 되었다. 돈을 받기 위해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결의를 높였다. 술을 마신 것이다. 우리 전에 배관하는 노동자들이 체불이 되었다가 밤에 돈을 받기 위해 소장 숙소에 쳐들어갔다가 되레 소장에게 뭇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우린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현장 소장에게 찾아 갔다. 내가 발로 창고 문을 걷어차자 문이 서서히 넘어갔다. 정씨와 나는 얼마나 악을 썼는지 목이 쉬었고, 소장은 낯을 붉히며 황급히 승용차를 타고 도망을 쳤다. 그 뒷모습에 대고 둘이 술 취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지를 질러댔다. 돈을 쉽게 받지는 못했다. 중간에 있던 사장이 돈을 가지고 잠적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 본사에 쳐들어가 돈을 받을 수가 있었다.

광양제철소, 이름만 들어도 내 한 호흡 호흡마다 그때의 냄새들이 난다. 다리 위에 관을 용접하던 용접사들, 버스에 꽉 찬 시커먼 노동자들, 공동구에서 은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배관사와 보온지를 지고 나르던 보온사들, 동네 일반공들, 능력 없는 사장, 드넓은 제철소 모래밭과, 제복을 집은 포철 관리자들, 바다 내음, 웅덩이에 갇혀 펄떡이던 팔뚝만한 물고기, 그리고 새벽안개와 운동하는 포크레인, 어머니를 이야기하며 웃던 정씨, 그리고 청춘을 그런 잡탕 웅덩이에서 보내는 나 자신. 어쨌든 광양제철소에 내 그런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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