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보이는 창

 

 

 

 

 

 

>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뿌리
 최경주  | 2004·12·19 05:42 | HIT : 2,915 | VOTE : 208 |
1
내가 결혼해서, 처가 첫 아이를 출산 할 때가 1998년도 5월 말이었다. 동 시대 민중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하는 소리가 한반도 전반에 흐르는, 엽기적인 구제금융의 경제난으로 민중의 삶이 난자당한 해였다. 개인적으로 위원장 임기가 막 끝난 해였고, 조합에서는 건설노동자 생계대책을 요구하며 명동성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 중이었다. 농성은 200여일을 넘기고서야 접었다. 공포경제에 공포정치가 먹구름처럼 민중이 사는 하늘을 덮었다. 수많은 악성루머가 칼처럼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찔러댔다. 공포, 공포, 공포. 당장의 어려움보다 미래가 없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인간의 생리와 생물학적 의무는 계속되었다.
당시 처는 임신 중이었고 만삭이었다. 오월 말이 되어 몸을 풀게 되었다. 내가 처한 형편과 관계없이 나올 날이 예약되어 있는 아기는 기어이 날을 지키고자 했다. 무엇으로 저 넓은 우주를 떠돌던 먼지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겠다는 놈을 막을 수가 있는가? 천하 없이 굶어 죽더라도 나올 놈은 나오는 것이 이치가 아니겠는가! 녀석은 날이 차오자 처를 재촉했다. 계속 문을 열기위해 노크를 하는 것이었다.
처가에는 칠순 장모 혼자 계셨고, 집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내가 빈곤을 씹고 있었다. 처는 평소 친하게 지낸 처남댁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초산이니 나름대로 두려움이 있었으리라. 말은 안했지마는. 처가 몸 푸는 곳은 용인시내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이었다. 용인에는 처와 가까운 셋째 처남이 살고 있었다. 처가 산통을 시작해 병원에 입원한지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날 자정쯤 병원 앞 개천의 물이 소리 없이 흐를 때, 처의 진통이 심해지자 분만실로 옮겨졌다. 나는 서투른 예비아빠로 달리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처가 아이를 낳는 상황에 맞는 무언가를 했어야 했는데, 머릿속에는 딴 생각만 잔뜩 들어 있었다. 처의 골반이 늘어나고 뱃속에 있는 생면부지의 한 인간이 세상을 보겠다고 꿈틀대며 나오려는데, 내 감각은 무디어 딴청을 떨고 있다니. 그때 문득 갑자기 평소 마시지 않던 커피가 생각났다. 아마 차라도 마시면서 어색한 기분을 달래보자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병원의 자정은 시간이 끊어진 사진 속 같다. 차가운 인테리어의 적막함속에 산통 하는 여자들의 신임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이다. 남편이라고는 나 혼자였다. 산모는 처까지 셋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 남편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나마 따지고 보면 그래도 내가 게 중에 제일 훌륭한 남편이 아니었을까! 어려운 시기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분만실은 이층이었다. 나는 처의 간헐적인 고통을 뒤로하고 일층 현관 쪽으로 내려가 자판기 커피를 들고 우두커니 서서 별 생각 없이 빨리 아내가 애를 낳고 집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꺼진 텔레비전이 있었고, 화분이 있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약을 타기위해 대기하는 빈 의자들이 있었던 것 같고, 응급실은 한가해 보였다. 몇 분을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서성거렸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십 여만이 있었다. 처가 배라도 짼다면 수술비용은 어림도 없는 돈이었다. 현관 앞 파란 비상등이 처량한 나를 내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애를 낳겠다고 처가에 내려간 처가 돈 구해오라고 전화가 왔으나,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평소 돈 거래를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돈을 꿀 때도 마땅히 없었다. 급한 대로 친한 동료에게 전화를 해 놨으나, 막상 그들에게 갔을 때는 난처해했다. 그들이나 나나 너무 어려운 시기였다. 결국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합 사무국장에게 부탁을 했다. 평소 조직의 돈을 사적으로 유용하지 말라고 누누이 떠들던 나였는데, 어려우니 별 수 없이 조합의 일반회계에서 돈을 빌렸다.
조합에서 십 여 만원하고, 평소 집안일에 소홀히 했던 내가 염치없이 누나에게 몇 십 만원을 빌려 용인으로 내려갔다. 그때는 무보수로 조합 위원장을 하고 난 후였기에 돈이 없었다. 그 악명 높은 구제금융의 98년이었으니. 수술을 하게 되면 용인에 사는 처남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다. 설마 자기 동생이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는데 병원에 그냥 맡겨 두지야 않겠지 싶었다. 처남이 눈치 채고 돈 때문이라면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그 말이 속으로 고마웠지만, 괜찮다고 했다. 의사가 자연분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아래층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슬슬 올라가 볼까! 하고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가는데, 전율을 느끼는 한 소리가 있었으니, 아이 울음소리였다. 어두운 복도 끝에는 나는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그 작은 소리의 울림만으로 내 심장을 자극했다. 나는 영점 일초기는 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전율에 휩싸였다. 이 전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직 심장과 피만이 알 것이다. 그 묘한 흥분이란!
나는 분만실로 뛰어 갔다. 남자 간호사가 손을 씻고 있었다. ‘어디 가셨어요? 막 애 낳아 일반실로 올라가셨는데’ ‘뭐를 낳습니까?’ ‘아들입니다. 하나 더 낳으셔야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뒤 칸막이에서는 젊은 부인이 허리 진통을 호소하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뒤로 열린 문밖 복도에는 내 아들이 세상에 처음 나서 이동한 길이 엘리베이터까지 나 있었다. 산통 하는 그녀와 그 건너편 여인은 이틀째 그곳에 있었다. 그에 비하면 처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처는 내가 내려간 사이 잠깐 사이 아이를 낳고 처는 일반실로 옮긴 것이다. 나는 병실로 뛰어갔으나, 아쉽게도 아이를 볼 수가 없었다. 아이는 산모와 분리시켜 놓았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아들을 낳았음을 알렸다.
다음날 아이를 봤을 때 그 감동이란 역시 겪어보지 못한 묘한 느낌이었다. 방에 여러 아기들이 있었는데, 한눈에 저 놈은 내 새끼구나 하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녀석을 처음 본 순간, 그건 생소한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 오랜만에 만난 푹 익은 절친한 친구를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기분. 반가움. 아주 오랫동안 함께 했던 벗과 같은 느낌. 이미 준비되어 있는,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만남의 기쁨. 그건 세상에가 가장 멋진 조우였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내가 태어난 것이다. 자성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긴 호흡을 한 것이다. ‘안녕! 그런데 당신이 아빠야? 실망인데, 왜 이리 눈이 작아. 하여튼 부모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부탁드려요. 보아하니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지만. 하나 알아 둘 것이 있다면 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답니다. 그 점을 유의해주세요. 그리고 이름 멋진 것 하나 부탁해요. 아주 멋진’ 녀석은 작은 입을 벌렁거리면서 그걸 말하고 있었다. 얼마 전 큰 아들이 작은 놈에게 밥상을 놓고 마주앉아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애가 아빠야!’ 그 말에 웃기는 했지만, 한 가족으로서 동질감과 독자성과 자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내 아버지는 나를 낳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말하나 마나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한 이십여 년 전에 ‘알렉스 해일리’의 ‘뿌리’라는 영화에서 ‘쿤타킨테’의 아버지는 아들을 낳자 밖으로 나와 하늘높이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조상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 장면은 부모와 자식의 조우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둠속에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 진 아이가 저 넓은 우주와 첫 대면을 하자, 순간 아이는 꿈틀댄다.
비록 노예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쿤타’도, 대대로 노동일을 하는 나도, 초 재벌 ‘빌게이츠’도 그런 점에서는 동격이다. 단지 그 후에 물려받는 것이 차이는 있지만. 내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가졌듯이 나도 세상에서 유일한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삶을 같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리하거나 상관없이 말이다. 아버지는 한분이며 그 존재는 생존의 여부에 관계없이 내게는 영원한 것이다.

2
누구에게나 있는 아버지지만, 내 아버지는 말 그대로 나만의 아버지였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 내 자식에게 늘 입에 달고 사는 ‘사랑’이란 말을 단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지만, 사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이란 말이 굳이 필요할까마는, 내 아버지는 세상에 한분뿐인 소중한 분이셨다. 다른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솔직히 살아계실 때는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없다. 그저 원래 그 자리에 있으셨던 분이셨나 보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다른 아버지는 내 동료나 적들 그리고 선의의 경쟁자와 동시대의 계급을 형성하는 숱한 무리들을 창조했지만 나만큼은 세상의 단 한분 내 아버지의 몫이었다. 시대를 풍미해간 숱한 군상들 속에 내 눈에 들어오는 내 삶의 원천적은인은, 내 직계 피붙이며, 내 자식에게 생김새와 피를 물려준 시원은 딱 한분, 바로 내 아버지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난 내 아버지의 몸을 빌어서 세상에 나왔다. 돌에서 나온 원숭이는 아니니 다른 말이 필요할까마는. 확실히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말은 달리하면 아버지는 세상을 내게 선물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특별하신 분은 아니다. 내 존재의 의미면에서는 신이지만, 보편적인 다른 아버지에 비하면 아쉬움과 고마움이 반반이다. 아버지는 말년에 이 사회 하층계급이 하는 일인 건축 노동일을 충실히 한 노동자의 한사람이었다. 충실히 하지 않으면 굶어 죽었을 조건이긴 하지만.
내 아버지였지만 수많은 노동자들 틈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기술 같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단순한 날품일꾼이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 사회에 주변부에 갈수록 흔한 것이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잘생기셨나? 모르겠다.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생겼다. 단지 잘 먹고 살아온 희고 윤기 있는, 그러기 위해 강인하거나 사물을 꼼짝 못하게 뚫어보는 총명과 경쟁사회에 언제든 어떤 상황이든 최소한의 주도권을 쥐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넘치는 자신감 있는 인상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보편적인 가난한 사람의 얼굴, 난장에서 몸을 굴려 딱 먹고 살만큼만 벌어들일 수밖에 없는 건설현장의 얼굴들이 그 자체였다. 단적으로 아버지는 그 또래, 무리 중에서 머리가 특출하게 좋으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가족의 운명이 좀 더 순조로웠을 테지만, 아버지도 가끔 인정하시기를 열심히는 했는데 뭔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중간키에 활달한 성격, 가족에게는 과묵한 성격이셨고, 돈 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성실히 일을 하셨다. 사회에서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있되 세상에 대한 분노는 크게 없으셨다. 운명에 순종하고, 어려운 삶을 착실하게 방아 들이셨다. 아버지는 위대한 인간의 생식능력으로 나에게 무한한 세계를 열어 주셨지만, 아버지나 나나 수많은 사람이 흘러 다니는 민중들 속에 살아가는 민중 그 이상은 아니었다. 사실 우주를 선사 받은 것 외에는, 오직 몸을 굴려 사회의 많은 것들을 떠받치고 내 목구멍을 해결해야 하는 수만, 수십, 수백만 민중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특별할 것 아무것도 없는 삶 중에 하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오십 넷이셨나? 아마 그럴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뒷목덜미를 껴안고 자리에 주저앉으셨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던 것이 충격의 이유였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 한분이 동네 주택공사를 아버지에게 넘긴 것이다. 대충 그 공사 하나를 끝내면 한 달 벌이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을까! 일 같지도 않은 축대보수나, 방수, 담을 헐거나 쌓는 일, 부엌을 내거나 일이 없으시면 친구들 따라 다니며 잡부 일을 하셨는데, 뜻하지 않게 돈 좀 되는 일을 맡으신 것이다. 그렇게 좋으셨을까? 흥분한 아버지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셨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은, 근래 계속 하고 있는 일들이 잡스런 일보다 덩어리가 점점 커갔던 것이다. 그러다 누가 봐도 일 같은 일이 들어온 것이니, 가슴이 벅찼겠지. ‘빌빌거리는 친구들을 모아 보란 듯이 기분 좋게 한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술을 한잔한다면’ 그 맛이 보통 맛이 아니었으리라. 이대로 일만 잘 풀리면 한몫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만 있으면 처리할 방법을 얼마든지 있다. ‘그래 말년에 자리 한번 잡아보자.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것이다. 으하하하’ 전화를 내려놓고 기쁨이 너무 커 혈관에 무리가 간 것이다. 약한 뇌혈관이 급속하게 팽창해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혈압인가?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도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하필이면, 아마 혈관이 일뿐이 아니라 잦은 스트레스에 막걸리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이다. 너덜너덜한 혈관에 뜨거운 피가 한꺼번에 솟구쳐버리다니. 뇌가 피에 젖으니 황망한 죽음이 당신을 건사하게 생긴 것이다. 운명이라고는 개뿔이나 한 몸 건사도 못하더니 죽음도 그렇게 가벼이 던져준 것이다.
아버지는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 걷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쓰러짐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커다란 슬픔이었다. 어머니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는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동네 술집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제일 먼저 들린다는, 술자리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못하셨다. 쓰러진 몇 칠 후 아버지는 영원히 올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갚을 돈도, 받을 돈도 없었다. 누구에게 원한도 없고, 못 이루어 안타까울 일도 없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혼란스러운 철학도 없고, 풀다만 문젯거리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럭저럭 건강하게 큰 자식들과 처 그리고 못다 마신 술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 개인에게 아버지는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축구나 권투를 볼 때, 둘이 목이 쉬도록 응원을 했지만 마주보면 아버지와 나는 딱히 들려줄 이야기도, 들을 이야기도 별로 없었다.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몇 번 되지 않아 다 기억을 하고 있을 정도다. 격렬한 토론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게 다다.
아버지와 격렬한 토론을 처음 한 것은 광주 항쟁 때로 기억이 난다. 80년 5월 초 어느 날 평화시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서 고함을 치고 우시고 계셨다. ‘저 놈들 고향사람 다 죽이네!’를 연시 외치고 계셨다. 발을 구르며 안절부절 못하고 계셨다. 사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는 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은 폭도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린다는 내용인데 아버지는 그것을 사실로 믿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건 폭도들이 퍼트린 유언비어라고 일러드렸다. 아버지는 그게 아니고 사실이라고 내게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잘못알고 계신 겁니다. 그럼 텔레비전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세상 사람이 이걸 보고 있는데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나는 아버지의 왜곡된 생각을 고쳐드리려고 사실 그대로 말을 드렸다. 자식의 도리로서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시고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소리를 치셨다. 분명 내 앞에서 정규방송이 여고생의 가슴이 난자당했다는 사실이 거짓말이라고 계속 되풀이 방송이 되고 있었는데, 아버지 귀에 눈에는 그게 들리지 않고 안보인단 말인가? 세상에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저 방송을 못 믿는다면 그게 말이나 되는가? ‘무식한분 같으니라고’ 나는 아버지에게 오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목소리만 커졌다. 결국 그 토론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똑같은 양의 고집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둘 사이에 논쟁이 끝났다. 내가 단체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서로 달리할 의견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정치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지만 그건 술집을 끼고 있는 복덕방에서의 일이었다. 고작 할 수 있는 구체적 정치적 행위는 동네 호남향우회에 가입하여 선거 때만 되면 야당 국회의원이 선거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가끔 당을 바꾸어 활동을 하셨다. 아마 동네에 친구들이 많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선거사업에 협력을 구해 그런 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대체적으로 김선생이 있는 야당활동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가 쓰러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세 번째였다. 두 번은 하룻밤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별일 없이 다니셨지만 세 번째는 틀렸다. 쇼크가 연이어 왔다. 곧 병원에 입원하셨다. 완전히 의식불명이었다. 이남이녀와 어머니는 우울한 날을 개인병원에서 모여 몇 칠을 보냈다. 삼일 째 이모가 나를 한쪽으로 불렀다. 짧은 이야기였지만 아버지가 가망이 없으니 퇴원하는 게 어떤가를 몇 바퀴 돌려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퇴원은 삶을 정리해 드리는 다른 말이었다. 지금은 법으로 금지된 일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자본주의에서 가난한 자에게는 때로는 금지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희망 없는 생명을 영위함 보다 살아나갈 자의 생존이 더 우선하지 않는가! 아버지는 누구보다 애국자였지만 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불분명한 애국자에게 무엇을 해줄 무엇이 별로 없었다. 그건 당신의 문제였다. ‘일을 하란 말이야. 죽을 때까지, 그런데 왜 돈을 못 벌어. 게을러서 그런 것 아니야, 이 밥통아! 그럼 죽어야지. 누구에게 기대려고 해! 국가 재산에? 맙소사 그건 우리 기득권자들의 몫이야! 가난은 죄악이야! 전생이든 현생이든. 뭘 알아야지! 하늘의 뜻이 뭔지 알아. 분수? 죽어 일 못하면 죽어야지. 쌀 축내지 말고!’ 자본주의 차가운 뱀들은 똬리를 틀고 앉아 그렇게 웅변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셨다. 노동에 질린 분이셨다.
형제들은 나와 눈길을 피하고 있었지만 온통 내 결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이모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판단하고 싶다고 했다. 내 말에 의사는 귀찮은 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내 말대로 아버지를 단층촬영이 가능한 다른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은 의사와 나, 사촌형이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다. 의사는 수술성공 20퍼센트를 말하였다. 머리에 핏줄이 너무 심하게 터졌다는 것이었다. ‘힘들어요! 설사 성공해도 이후를 장담할 수 없고 계속 누워계셔야 합니다’ 나는 그 진단서를 가지고 병원에 돌아가서 퇴원을 통보했다. 막내는 강하게 반발을 했지만, 유감스럽게 그에게는 별로 권한이 없었다. 어머니는 말이 없으셨고, 다른 누나와 여동생은 눈물을 흘리며 순응했다. 몇 칠 후 아버지는 고향에서 올라온 자매들과 친지들이 지켜보는데 숨을 거두셨다.
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어머니는 그날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셨다. 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게 이유가 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설사 수술을 결정했다 해도 우리에게는 수술비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나는 결정을 내야 하는 당사자였다. 우리가 가진 것은 칠백만 원 짜리 전세 돈이 다였다. 아버지는 쓰러 질 때를 대비해 돈을 모아놓지 못하셨다. 번 돈은 대부분 우리들이 성장하면서 소비했던 것이다. 곧 아버지는 허름한 반 지하 다세대 주택 안으로 옮겨졌다.
지금 아버지는 화순 동면 산기슭에 누워 묘위로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떼만 덥고 있을 뿐이다. 후에 아버지는 나를 만나면 뭐라고 말씀을 하실까? ‘잔인한 놈, 그건 너다’ 아마 그렇게 말씀 하시지 않을까?
아버지는 비교적 건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졌었다. ‘질긴 전라도 사내’라고 표현하면 대충 맞을 것이다. 구남매 중 위로 두 형은 전쟁전후로 돌아가셨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도 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두 형 중 한분은 산에서 한분은 광주교도소에서. 아버지는 졸지에 ‘어느 날 갑자기’ 청소년기에 가장이 된 것이다. 살아있지 않으면 죽어 있어야 할 험한 시기를 오직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살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숨이 막히는 나날이었으리라.
그래도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항상 호탕한 웃음뿐이었다. 지나치게 허세 담긴, 우렁찬 목소리.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아버지는 용케 글을 깨우치셨고, 한자를 꽤 아셨다. 바둑도 잘 두셨고. 그 외에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뼈가 녹아나도록 노동을 하셨다. 과일 노점, 한약재배, 연탄장사, 막걸리를 주로 파는 대포 집, 결국 건설현장의 잡부로 나선 것이다.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북가좌동 증산동 일대에서 전전해 살다가 그곳에 주택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살게 되면서 이러저러한 일로 생기고 없어지는 일을 쫒아 생계를 이어온 것이다.
나는 화순에 있는 동면초등학교 1학년 1학기 겨울방학을 하고 집에 갔을 때, 한동안 안보이셨던 아버지가 집에 와 있었다. 할머니는 아쉬운 듯 내 등을 떠미셨고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지금은 없어진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에 미리 와서 살집과 이것저것을 준비하고 끝으로 나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지금의 서대문구에 있는 북가좌동 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한 일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쓰레기를 뒤져 재활용품을 모아 팔기도 했다. 쓰레기더미를 뒤집는 일을 한동안 하다가 나중에는 과일노점과 연탄장사를 하셨다. 이사는 그리 자주 다니지는 않았다. 서대문구의 북가좌동에서 은평구 증산동으로 다시 그 위 신사동으로 증산천이라는 개천을 따라 살아가시다가 삶을 정리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막상 돌아가시자, 병원에는 한 번도 문병을 오지 않았던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몇 분이 오시더니 나를 앉혀놓고 이후 삼일간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세 개 동네에 연락을 하여 아버지 친구들이 모이셨다. 장의사 하는 친구도 있어, 장사는 수월하게 지냈다. 거의 돈도 들지 않았고. 가난하지만 좋은 친구들이셨다. 지금 생각해도 술친구들이 꽤나 많으셨다. 친구라고 찾아와 인사를 한 것이 꽤 많으셨다. 세 개 동네 노동일을 하는 분은 다 오신 것 같았다. 소주 대병을 들고 와 조문을 한 친구도 있었고, 빈손 친구들도 꽤 오셨다. 모두 가난한 노동자 친구들이었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은 막걸리와 소주뿐인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늘 아버지 또래의 친구들 틈에 계셨다. 윷을 놓거나, 화투와 바둑, 친구 복덕방에 항상 계셨고, 집보다는 막걸리 집에 더 많이 계셨다.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리면 동네 어느 구석인지 모르지만 제일 먼저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다고 농담을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허풍쟁이’ 혹은 세제인 ‘하이타이’라고 말하셨다. 거품만 있지 실상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셨다.
아버지가 청년시절 별일을 다 하셨다고 들었지만 그 별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동생들 옷을 입히기 위해 뜨개질까지 했단 말을 들었다. 전력이 있는 집안이라 취직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순전히 하청업체에서 뼈 빠지게 탄만 캤을 뿐이었나 보다. 내가 올라오기 직전까지 선산을 봐주고 선산에 붙은 밭을 가꾸어 먹고 살기도 했다고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지나가는 말로 말하기를, 빨갱이 집인데 그나마 그 동네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큰 아버지가 동네사람에 못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 사이에는 숱한 내용이 있겠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말이 큰 아버지지 당시 나이 서른 전후의 청년이었다.
전쟁 전 후로 아버지는 이렇다 할 학력이 없으며 동네에서 힘만 센 청년이었나 보다. 동네에서 불학무식한 놈이 있으면 동네 어른들 말 따라 쫓아내는 일도 했다던 말을 들었다. 지금의 내가 그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숨이 막힐 일이다. 어린 동생들, 대부분 여동생이고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아마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당장 서울로 올라와 고철을 모아 고물상을 하고 강남일대의 땅을 사 모을 것이다. 계속 말이다. 아버지가 그랬다면 내 처지도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비효과를 기대해 볼만도 하지만 상상일 뿐 지금 내 현실을 바꾸어 놓을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1970년 아버지는 대나무가 울창한 집을 뒤로하고, 늙은 어머니를 동생부부에게 남겨두고 서른 초반 자본이 집적되어 경제의 핵인 서울로 가족을 끌고 올라오셨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비로소 현금이 되는 갖가지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그렇게 번 돈이 사는데 부족했다. 돈 모으는 기술은 좀 작았던 것 같다. 꼭 조건 탓하지 말고, 솔직하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영혼은 꽤나 자유로운 분이셨다. 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하시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세상 걱정을 안중에도 없었다. 거친 농담과 과장된 위세, 열띤 웅변, 그 연세에 사람들을 붙잡고 팔씨름, 발씨름을 하곤 하셨다. 책임감 또한 너무 강해 늘 나에게 가족을 제일로 여기라고 몇 번을 당부하곤 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었을 것이리라. 아버지는 아홉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불가피한 가족의 생계를 짊어졌다.
어느 비 오는 날, 증산동 살 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 잠을 자다 말고 나왔는데, 아버지가 친구들과 옷을 벗고 동그란 맨홀에 둘러서서 힘자랑을 하시고 계셨다. 우산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맨홀을 들어 누가 멀리 옮기나 내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치한 일이 틀림없었다. 이십년 지기 이상의 친구들이고 동네 토박이라 스스럼없이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 보다 어렸을 때의 일도 하나 있다. 서울 올라온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증산천 개천 따라 판자촌이 즐비하게 이어졌을 때였다. 판자와 눅빈을 얻어 만든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철거되기 직전까지 유지되었다. 어느 새벽에 어머니가 서너 집이 함께 쓰는 화장실을 다녀오시면서 앞집에 새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아저씨가 욕을 하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밖에서 그 아저씨가 밤새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도 잠에서 깼다. 아버지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러닝셔츠와 파자마 차림으로 밖에 나가셨다. 나가자마자 ‘형님’이란 말이 반복되어 나왔다. 그 목소리는 멀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동네 입구 벽돌공장 앞에서 그 아저씨를 만났다. 벽돌을 찍어대는 청년의 구릿빛 어깨가 번쩍이고 모래를 틀에 넣고 좌우로 바닥에 찧어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혼자 뚜벅대며 그림자와 걷고 있는데 멀리 앞집 아저씨가 걸어오고 이었다. 그 아저씨 뒤로는 태양이 빛나고 아저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벽돌에서 틀을 빼내는 쇳소리가 ‘썽’하며 들리고 나는 평소 거친 아저씨가 두려워 길 옆 벽돌이 즐비하게 쌓인 밑으로 붙어 걸어갔다. 막 마주쳐 엇갈리는 순간 느닷없이 아저씨는 두 손을 들고 나에게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저씨는 얼굴은 그야말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온통 얼굴 전체가 혹이 울퉁불퉁 나서 파랗고 붉은 피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냅다 동네 쪽으로 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아버지는 좀 거칠었다. 내가 어디서 맞고 들어오면 가만있지 않으셨다. 나를 데리고 기어이 때린 그 아이에게 갔다. 꼭 사과를 받아 와야 했다. 아마 그 부모가 항의한다면 그 부모도 가만 두지 않고 두들겨 팼을 것이다. 그래서 맞아도 맞았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 맞을 일도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 말년에는 그 좋은 몸이 차츰 하나씩 망가지기 시작했다. 몸 관리를 한다는 것이 말 자체가 듣기 힘든 동네였다.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계급이며 그래야 하는 세대였다. 아버지 친구 분들이 하나씩 오십 전후로 쓰러지거나 간간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동네도 바뀌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또래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늙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친구보다 후배들하고 일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걸음걸이가 무디어지고, 어깨는 균형을 잃고 늘어졌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직 그런대로 힘이 있었지만 몸 구석구석 안으로 밖으로 상처들이 쌓여갔다. 한번은 일하다 다친 아버지의 다리를 본 적이 있다. 정강이를 따라 길게 살이 패여 내려온 피딱지가 너무나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바지를 수줍게 걷어 올리던 다리를 어머니와 나는 보고 어쩔 줄 몰랐다.
아버지는 주무실 때를 제하고 대부분 아버지 친구들과 함께 지냈다. 몇 개의 막걸리 집과 성씨라는 분의 복덕방, 동네 입구 커다란 철물점이 아버지 행동구역이었다. 그 공간 내에서 동네 집수리 공사가 대부분 거래되고 사람이 모아졌다. 아버지 친구 중에 기억나는 분이 복덕방 성씨였다. 그 분에게 장기 둘 때 애통을 넣는 공식을 배웠다. 비록 중학생이긴 했지만 자주 아버지 친구들과 장기를 두었다. 내 또래 중에 져본 친구들이 없을 정도로 장기는 잘 두었다. 그래 봐야 동네 장기긴 하지만. 성씨 아저씨는 장기를 두면서 ‘궁을 몰아, 한쪽으로 꼼짝 못하게’ 그게 아저씨 애통 수의 기본 기조였다. 다른 건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수를 배워 지방 다닐 때 자주 써먹었지만 장기를 조금만 두어본 사람에게는 말만 낭비할 뿐 통하지 않는 수였다. 양귀마를 잘 두는 할아버지도 한 분 계셨다. 특별히 일을 별로 하시지는 않았지만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면서 장기를 두셨다. 그 할아버지에게 어깨 넘어 양귀마를 배웠다. 얼마 전 수도권 인천 이위원장과 회의 직전에 시간이 있어 장기를 두었는데, 그 양반이 양귀마를 두었다. 자리만 양귀마가 아니라 수순이 정확했다. 얼마나 반가운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그 동네를 나왔다. 지금 사는 부천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셨다. 친구들이 그리 많은데 굳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3
우리 집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서 아버지의 사형제는 모두 돌아가셨다. 맏이는 지리산 자락에서는, 둘째는 광주교도소에서 이질로, 얼마 전에 시제를 지내러 갔다가 그 분 또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둘째 큰아버지에게 교도소에서 편지가 왔다고 했다. 이질에 걸렸고 돈을 얼마 가져오면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가지 못했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셋째인 아버지는 노동자로 살다가 혈압으로 가셨고, 넷째인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십년 전쯤 화순 탄광 광부로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들리는 말로는 농약으로 자살을 하셨다고 추측을 하는 분도 계신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넷째인 작은 아버지도 만만치 않은 삶을 사셨다. 첫째 부인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두 딸이 있었다. 그 후 새로 얻은 둘째 작은 어머니는 두 아들과 막내딸을 낳았다. 지금은 각기 먹고 살기위해 뿔뿔이 흩어져 몇 년에 얼굴 한번 볼 일이 없다.
아버지 쪽 형제들로 보면 내가 제일 어른이 되었다. 덕분에 없는 살림에 본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어른 제사를 모시고 있다. 집안의 기둥답게 흩어진 가계를 모으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생각을 해본적도 없지만. 그 일을 아버지의 일이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걸 요구하는 자나 내 스스로 그래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분이 그걸 하고 계신다. 고향에 아버지 사촌쯤 되시는 분들이 해마다 나에게 연락이 온다. 집안에 말로만 내려오던 묘를 찾았다는 것이다. 족보에 있는 대로 무등산 자락이나 화순 근교를 돌아 묘를 하나씩 찾았다고 했다. 그 중 가장 위 어른인 묘에서 한식날 시제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장손 아닌 장손으로 가야했다. 올 해로 세 번째 내려갔다. 내 사촌 형제인 실제 장손이 있으나 녀석이 오지 않는다. 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그 놈이 올 때까지만 내가 장손을 해야 한단다.

1936년은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난 해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해에 태어났을까? 거대한 고통의 행렬에 동참하기위해 아버지도 태어나신 것이다. 대부분의 가난한 집에서 났듯이 아버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세상의 자연을 즐길 수 없었고, 어려운 생활고 틈에 손이 터지도록 아이들과 놀면서 날을 보내다가 해방을 맞이했으리라. 해방이 무슨 뜻인지나 알았을까?
생존이 목표인 사람들. 공격하는 자도 없고, 수비할 일도 없지만 어쨌든 삶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했던 세대가 아버지 세대다. 지금도, 없는 노동자는 마찬가지 일 테지만 그때는 더욱 어려웠다. 공중변소에, 시궁창에 오물이 흐르고, 밤마다 싸우는 소리, 가난한 동네 젊은이들은 싸구려 유행복에 긴 머리에 빗질을 하고 다녔지만 대게 허접한 삶들이었다. 열여섯이면 공장에 나가야 했다. 집단적인 고민은 없었다. 개인적인 삶의 경쟁 속에 취약한, 승산이 희박한 게임에 엑스트라로 뛰어야 했다. 아버지는 스스로는 주인공이었지만 인생이란 축구장 어느 구석에 있을 아무 의미 없는 관중이었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어느 날 닥친 철거반원들에게 이주비 십여 만원을 받고 동네를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근처 샛방을 얻어 이사를 하셨고, 이후 70년대를 지나 80년 말을 지나는 동안 식당의 잔밥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아버지도 나도 건설현장에서 숨 쉬고 사는 노가다가 되었고 내 아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를까? 아버지의 형들은 이상세계를 꿈꾸었고 나 또한 미흡하나마 그와 비슷한 삶을 쫓고 있고, 내 자식들 또한 그런 삶을 이어받을 것이다. 내말이 딱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럴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삶은 힘든 삶이었다. 가끔 낙담도 하였지만 우울해 하시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에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셨을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에게 막걸리 한통을 택배로 보내고 싶다. 이 쌉쌀한 날씨에 찬 막걸리 한잔이 얼마나 별미던가! 푸하하하!

1963년 음력 9월, 어머니는 나를 낳으실 때, 아버지는 건너 방에서 할머니와 주무시고 계셨단다. 어머니는 산통이 심해도 이를 악물고 혼자 애를 낳으려고 했다. 첫 딸을 낳고 너무도 힘든 구박을 받아 둘째를 낳으면 조용히 저 어둠의 세계로 되돌려 보내려고 그랬다는데, 지금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설마’ 한다. 어쨌든 어둠속에서 어머니는 혼자 나를 나으셨다. 그리고 아들이었고 비로소 건넌방에 알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때 어떤 기분이셨을까?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178   건설, 건설노동자  최경주 03·12·01 4629
177   광양이라? 그래 그곳에 광양제철소가 있지.  최경주 04·02·24 5650
176   위대한 만찬  최경주 04·05·31 5366
175   어떤 부부싸움  최경주 04·09·29 3661
  뿌리  최경주 04·12·19 2915
173   건설, 건설노동자  최경주 03·12·01 4324
172   광양이라? 그래 그곳에 광양제철소가 있지.  최경주 04·02·24 5836
171   위대한 만찬  최경주 04·05·31 5357
170   어떤 부부싸움  최경주 04·09·29 3455
169   뿌리  최경주 04·12·19 3080
168   시가 되어버린 기억   03·11·07 4595
167   건설, 건설노동자  최경주 03·12·01 4313
166   고통, 그리고 광끼  최경주 04·01·19 4678
165   상도동 내 친구  최경주 04·01·25 4068
164   명성 이자녹스  최경주 04·02·12 4430
163   어떤 산행  최경주 04·02·14 5070
162   광양이라? 그래 그곳에 광양제철소가 있지.  최경주 04·02·24 5555
161   아버지의 형제들   04·04·12 5274
160   빌어먹을!  최경주 04·04·23 6557
159   은장도?  최경주 04·05·04 5676
123456789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