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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온 형9-플로리다 장씨
 칼럼니스트  | 2010·08·15 21:01 | HIT : 3,014 | VOTE : 288 |





           이 현장에서 5개월이 지나는 동안 처음 베이징 형과 일을 해 보고는 줄곧 플로리다에서 온 장씨하고 일을 하였다. 그가 그만둔다고 떠난 일주일 전 이후 혼자 하다가 지난 주 금토일 이틀간 베이징 형과 함께 일을 하였다. 둘이 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장씨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베이징 형은 둘이 상극이라 잘 맞지 않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세상사가 그렇듯 사람은 결코 같은 조건이라도 달랐다.  
장씨는 나보다 며칠 현장에 먼저 왔지만 처음에 잠깐 함께 하고 이후에 떨어졌다가 언제부턴가 나와 짝이 되었다. 그 전에는 나와 함께 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애초 나와 일을 하게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데려온 사람도 아니고 이 현장에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 둘을 더 데리고 와서 그들과 조를 짜야했다. 하지만 팀이 어지럽게 이합집산을 몇 번 하더니 엉뚱한 짝끼리 만나 일을 하게 되었다.
조선족은 김반장을 중심으로 다섯 혹은 여섯이 짝을 맞추어 일했고, 김반장 표현에 의하면 국내산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일했다. 혹, 국내산에 짝이 없을 때는 수입산 조공들과 짝을 맞추어 2인 1조 작업을 했다. 수입산이니 국내산이니 하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4월 초 3월 임금이 나오지 않아 조선족이 싸울 때였다. 조선족 김반장 하는 말이 ‘수입산이라서 돈을 늦게 주나?’ 했을 때부터다. 그 말은 국내산은 먼저 받아서 좋겠다! 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김반장 뒷줄에 앉아 돈 내놓으라고 항의를 하던 수입산들이 그 말이 통쾌했는지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여러 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래는 국내산과 수입산 두 팀으로 나뉘어 일했다. 그러다가 하나 둘 짝을 애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팀을 만들어 흩어지더니 서너 팀이 되었다. 수유리 김씨는 둘을 데리고 지하 공조실로 내려갔고, 부평 황씨 형님은 다른 층에 하자를 봤고, 나는 화장실 배기를 했고, pvc 고슴도치도 한팀을 짜고, 유반장, 김반장도 한팀씩 짜 자기 일을 했다. 나는 베이징 형과 헤어지고 나서 이리저리 꿰맞추어 지원하러 다니다 플로리다 장씨를 보조받아 줄곧 함께 했다.
장씨는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미국 남쪽 플로리다에서 호텔 일을 하다가 10년 전 쯤 국내로 들어와 현장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삼십 대인 80년대 초에 사우디를 갔었다. 아마 그때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다. 중동을 1년 다녀온 다음, 친구가 가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주노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휴양지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했다고 직접 들었는데 수유리 이씨는 유람선에서 화장 일을 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그는 객실 청소를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와 겪으면서 드는 생각은 20년 동안 미국 남부에서 일했는데 직업이 둘 이상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50이 넘어 90을 넘은 부모가 노환이 생기자 귀국을 하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꽤 효자다. 단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 부모로서 마음이 무겁겠구나 싶었다. 그는 눈썹이 진하고 눈동자가 검어 강단이 엿보였다. 농담을 잘하고 가끔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 소름이 끼치게 하곤 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녹차와 알 수 없는 약과 특이한 음료가 있어 혼자 꺼내 마시곤 했다. 그는 현장에 많은 그 또래의 선배들이 그렇듯 외국을 경험한 수입산과 국내산의 경험이 풍부했다.

그는 눈썹이 어찌나 억세고 길게 자랐는지 조순총리가 생각났다. 눈썹으로 따지면 신선 눈썹인 조순하고 똑같았다. 가끔 앉아서 쉴 때면 눈썹을 가지런하게 당겼다. 조금만 길다면 빗질을 하겠지만, 그 이상이 되면 부러진다고 한다.
장씨에게는 눈에 띄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리였다. 처음에는 잘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뒤에서 보면 약간 다리를 절었다. 보기에는 약간이지만 일을 할 때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어디서 왜 그랬을까? 한쪽 다리가 짧은가? 옷을 갈아입을 때 봐야 하는데 내 자리와 멀리 있어서 보지 못했다. 일부러 쫓아가서 보는 사람도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건설 현장이라는 곳은 육체노동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적어도 눈에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이 주로 온다. 안으로는 죄 병 한가지씩을 가고 있어, 몇몇은 병원에 예약한 해놓고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쉬곤 했다. 장씨의 절룩거림이 일을 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장애로 치우치기에는 그 정도가 미세했고 걷는 속도와 균형 보폭이 정상 쪽에 가까웠다. 그가 일하는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러면 된 것이다. 단지 그는 나와 베이징 김씨 형 말대로 상극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와 일을 잘하고 있는데, 돈이 안 나와 김소장과 하청을 준 설비 업체 소장, 건설업체 설비담당인 차장과 다투면서 이견을 달리는 나와 조금씩 틀어졌다. 나는 그 균열이 그저 잠시 후 일을 하다 보면 없어지는 문제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함바 앞 아파트 정자에서 쉬고 있을 때, 공조실에서 일하던 이씨가 장씨를 이야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씨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최형과 잘 맞나 봐!”
그는 웃으며 말을 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을 했다.
“아닐 텐데, 최형이 사람이 좋아서 그런가!”
“공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장형 의견이 강해서 조금 부담스러웠지요. 아마 내 말을 이해 할 겁니다.”
장씨가 본래 공조실 이씨와 함께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며칠 늦게 이 현장에 왔으니 그들의 관계는 한팀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왜냐하면, 기계실까지 함께 갔으면서 막상 기계실 참바와 소음기를 다 달고 본격적으로 공조가 시작될 때 장씨가 떨어져 올라왔으니 둘 다 말하지 않는 뭔가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이씨는 다른 사람을 데려다 쓰기 시작했다.
이씨가 기계실을 할 때 쯤 나는 네 개 층 화장실 배기 작업이 맡겨졌다. 틈틈이 다른 일도 하면서 장씨와 둘이 작업을 해 나갔다. 그러다 5월에 4월 임금이 나오지 않아 모두 일손을 놓고 싸울 때 나는 부득이 그럴 사정이 생겨나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첫날 일을 했으니 욕을 먹었다. 내 생각에 정말 부득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내가 문제가 있기보다는 현장에 문제가 있기는 했다. 여러 팀이 있으니 하나로 뭉쳐 대응을 못 했다. 쉬면서 싸우자는 사람과 일하러 나와서 출근 표시하고 앉아서 싸우자는 사람, 돈을 떼먹겠는가? 일을 하자는 사람 등 여러 질이었다. 나는 딱 중간적인 입장이었다. 돈이 며칠 늦는다고 싸움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상황이 돈이 안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김소장과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데 앞장서 싸우기도 뭐했다.
5월은 보름쯤에 걸쳐 두 번에 나누어 다 나오기는 했다. 문제는 그다음 달인 6월에 발생했다.
또 임금이 늦은 것이다. 거의 일주일쯤 늦었다. 그 일주일이 참기 어려웠다. 나와 일을 함께하는 장씨와 두어 사람이 일손을 놔버린 것이다. 나는 일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루쯤 일을 하지 않다가 나는 주섬주섬 연장을 집어 들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씨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지만 서로 할 말은 없었다.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쉬었어야 했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 그러기는 어려웠을 게다. 그 서너 명을 빼고는 나머지 20명 가까운 사람들은 다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이 제대로 될 일이 없었다. 가끔 앉아서 쉬다가 일을 하기를 반복했다. 그는 가끔 거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앉아 있었다. 설비 책임자도 소장도 반장들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 대신 돈을 주어야 해결이 되는데, 그들이 전달에 다시는 돈이 늦는 일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 또 늦었으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일주일쯤 지나 돈이 다 나오기는 했지만, 현장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사람들 관계도 그렇고 일도 그만큼 늦어졌다. 뭔가가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돈이었다.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사장도 임금에 관해서는 설비업체에 위임하게 되는 계기가 그달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했다. 사장도 그렇고 일꾼들도 불안해했으나 위 업체로 임금 책임이 넘어가고 나서는 일꾼입장에서는 안심되었다.
장씨는 돈이 나왔는데도 태업이 계속되었다. 그 정도 배짱이 있으면 충분히 누릴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 될 정도였다. 나에게 저 배짱이 있었다면 총연맹이나 국회까지 가서 뭐든 되지 않았을까?
“난 더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역시 대단한, 참으로 대단한 배포였다. 그 정도로 마음이 떴으면 현장을 옮겼을 텐데, 그는 떡하니 버텼다. 소장의 약점을 알았나? 모르겠다. 일도 내 의견을 일방적으로 듣지 않고 자기 의견을 맹렬하게 펼치곤 했다. 내 약점을 알았나? 아마 그런 것 같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기술이 나보다 위면 한 수 접고 자존심 꺾는 게 이 바닥 법인데 전혀 따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제대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대로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쉴 때와 일할 때를 임으로 정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공이 아니라 소장하고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허긴 10년을 하고도 누군가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소장이 알아주어 따로 아래에 사람을 붙여 주었더라면 그도 당당하게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 나는 조공이 아니었고 장씨보다 나았다. 그래서, 원래는 내가 장갑을 벗어야 쉬고 끼면 일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말하고 가야 하는데 그는 개의치 않았다. 현장이 불만이라 그런다고 하지만, 정상적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나와는 충돌이 불가피했다. 내가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데 보조인 장씨가 뒤틀기 시작하니 대부분 일을 혼자 떠안은 꼴이 되었다. 나는 몇 번을 그와 떨어질 것을 생각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데려온 부평 배불뚝이 김씨가 번번이 결근을 하고 일할 때는 다른 일꾼들과 싸움을 해 골치가 아파 데려올 수가 없었기도 했지만, 장씨를 딴 팀으로 보내면 마땅히 받아 줄 팀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끝내 감정이 폭발한 사람은 나였다. 하루는 땡볕에 자재가 들어왔는데 나 혼자 내렸다. 함께 앉아 있던 장씨와 베이징 김형은 그걸 못 봤는지 멀리서 앉아 있기만 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은 보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 전에도 그랬으니 그때라고 못 봤겠는가?
3미터짜리 전산 20다발과 볼트 너트 두 마대, 그리고 이것저것을 내려놓고 공조실 사람을 불러 옮기고 나니 주먹으로 지나가는 아무나 턱을 갈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소장을 찾아가 현장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소장은 이유를 물었으나 나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그저 그전부터 말을 했던 브라질에 일이 나와서 그만둔다고 했다.
“브라질 물 건너갔다고 했잖아!”
“다시 됐어요!”
“아침에 말이 없다가 왜 그래? 뭔가 감정선이 얽힌 것 같은데. 무슨 일이냐? 살짝 말해봐!”
“없어요. 됐어요. 난 갑니다.”
“너 혹시, 재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야. 사람 모함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그런 것 같은데.”
나는 그날부터 이틀 동안 현장을 나가지 않았다. 다른 현장을 갈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홧김에 그만둔 것 같아 마음이 찝찝했다. 김소장도 몇 번 전화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다시 나오라고 했다. 사실 다시 나가면 안 됐는데 일하는 사람끼리 감정을 가지고 현장을 정리한다는 게 도의적으로 아니다 싶었고 다른 현장으로 옮기는 순간 1시간 일찍 나가야 하고 1시간 늦게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해서 결국 3일 만에 다시 현장에 나갔다.만근을 해도 시원치않은데 손해가 심했다.
7월에는 임금이 딱 하루 늦었다. 설비에서 돈이 나오는데 설비는 딱 15일에 나왔는데 우리는 16일에 돈이 나온다고 했다. 하루쯤이라도 늦은 것은 늦은 거라 조선족 김반장은 오후 4시까지 돈을 기다렸다가 통장 입금이 되지 않으면 연장을 걷어 돈이 나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모처럼 수입산과 국내산이 단결했다. 문제는 나와 일을 하던 장씨가 오전에 그럭저럭 온갖 불만을 터트리더니 오후 들어 연장을 놓고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나도 돈이 또 늦어지는 것같아 억지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앉는 것을 본 순간 말없이 장갑을 벗어놓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더 이상 그 와는 일을 하기 싫기도 했지만, 현장에 정이 떨어졌다. 옷을 갈아입고 바로 현장을 뜨기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김소장을 만났다가 그에게 잡혀 한쪽으로 가서 한참 설교를 듣고 마음을 돌렸다.
오후 3시 반쯤 되어 김반장이 연변 사투리가 강한 말로 통장 확인을 해보자고 했다. 통장을 확인하니 역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조선족을 나는 한국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연장을 챙기라고 했다. 연장을 챙기고 내려가려는데 김소장이 올라와 한 번 더 확인을 해보라고 했다. 그때가 거의 4시 다 되었을 게다. 전화를 해보니 단돈 6원 들었다던 통장에서 모처럼 2백 얼마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해 주었더니 모두 화색이 돌아 저마다 확인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다.
다음 날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장씨와는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때쯤 공조실 이씨도 연락을 끊고 현장을 나갔으며 혼자 된 부평 배불뚝이 김씨가 공조실에서 후배들하고 싸우고 올라와 떠돌다가 내 아래층에서 일하는 베이징 김형 팀으로 와서 한 이틀 일을 하다 싸움을 하고 현장을 때려치우고 나가 버렸다. 7월 들어 마감작업이 들어가면서 세이크의 양씨 형님이 지원을 나오면서 나와 그가 일하고 장씨는 새로 온 이씨와 팀을 짜면서 한동안 떨어지게 되었다. 그와 떨어져 한 달쯤 일을 하니 그와의 갈등도 잊히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8월 휴가를 다녀오니 새로 왔던 이씨는 그만두고 양씨 형님은 세이크 자재가 들어와 아래로 내려가고 없었다. 휴가를 마치고 다른 현장에 가려고 했지만 역시 끝이 매끄럽지 못해 다시 나가기로 했다. 결국, 장씨와 다시 만나서 일하게 되었다.
며칠 장씨와 일을 함께하는데 전과 다르게 짜증을 자주 냈다. 그가 짜증을 낼 이유가 없었고, 어찌 보면 현장에서는 말이 안 되었다. 나이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기는 했지만 거의 한계에 와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 갔더라면 내가 보따리를 싸야 하거나 사람을 바꾸어야 했으리라. 사람 바꾸는 권한은 내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기는 내 성격상 힘들었다.
결국, 지난 토요일 그는 자신이 이번 주로 현장을 옮긴다고 했다. 그만두기로 한 주말 그는 평소보다 더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가는 사람과 다투기 싫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보따리를 쌌다. 나와 절친한 황씨 형님에게 말을 하고는 그는 다른 누구에게 말을 하지 않고 나오지 않았다.

황씨 형님도 휴가를 가서 베이징 김형과 단둘이 이틀간 일을 했다. 오랜만에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베이징 김형은 내가 아는 것보다 우리 둘 관계를 많이 알고 있지만, 말을 아꼈다. 장씨가 시간만 있으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내 이야기를 했을 테니 별별 이야기를 다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딱 한마디만 했다.
“둘은 상극이라니까.”
장씨와 일을 하면서 마음도 몸도 더 고됐다. 함마질부터 벽 타공을 죄 내가 다 했다. 장씨는 쉬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쉬었고 일을 하다 어디론가 가서 한참만에 와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불만은 돈이 나오지 않았을 때 함께 싸우지 않았던 것이 이유일 것이다. 언젠가 자신을 나쁜 놈으로 만든 것은 나라고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판단을 자신은 자기 판단을 따를 뿐이지 남의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나 또한 부담을 가지고 혼자 일을 했으니 차이가 있다면 그는 불만을 터트리는 것이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는 차이일 것이다. 또 하나 일을 남보다 너무 세다는 불만이 있을게다. 늘 투덜대던 말 중의 하나였으니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나와 일하면서 남들보다 자재운반을 많이 하게 되고 지저분한 일을 주로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김소장도 자재만 들어오면 내가 몇 층에 있던 호출을 했다. 덕분에 그는 나와 일하는 죄로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에 7층이고 6층에서 내려와 자재를 받아야 했다.
성격도 운세도 서로 극을 대하고 있었다는 말이 차라리 맞는 말일 게다.
내가 옳았나? 장씨가? 그런 무지한 말은 더는 오늘의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다.  누가 옳다니, 선악의 문제라기보다는 성향의 문제였다. 일거리를 따오는 나로서 일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 그는 그것에 무관하다는 투였다. 왜 현장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해주지 않는데 우리가 해야 하는가였다. 내가 틀렸나? 아니다, 그가 어느 정도 일을 해 주었다면 더 편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늘 일이 늦다고 생각되는 나는 더 일을 세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가 앉아 있었던 날을 계산하면 내가 그와 일한 총작업 일수에서 열흘 이상은 더 늘어지게 한 것 같다. 그는 그 책임을 현장에서 돈을 늦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말을 할 것이다. 결국, 전체 운영을 책임지는 소장 탓인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참으로 좋은 호인이다. 그렇게 게기는 데 장씨를 자르지 않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만두었다던 그가 다음 주 화요일부터 다시 출근을 하겠다고 전화가 왔단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하다니까. 우리 처지가 그만큼 처절하게 어려운 겁니다.”
그만둔다고 갔는데 어떤 생각으로 또 오는 걸까? 우와! 세상에 이런 일이. 신이여 내 일천한 경험에 빛을 내려 주소서! 빗물에 흠뻑 젖은 황톳길을 건너 출근을 하면서 김소장이 건네는 장씨의 전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 삶이 남한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이 한탄스러웠다. 그는 결코 이곳이 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온다는 말은 다른 곳이 마땅치 않아서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온다는 말이 아닌가? 내가 힘들었다면 그는 더 더더욱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나 또한 한 골통하지 않던가!
“사장은 이제 사람들 일부 정리하라고 자꾸 말을 하는데 말이야.”
김소장은 붕어 입같이 작은 얼굴에 탱그러진 입술을 오물거렸다.
시간만 나면 녹차를 들고 장씨는
“경주야! 나 미국 갈 거다. 거기 놀러 와라.”
말을 하곤 했는데, 그건 아직 마음일 뿐이다. 아마 그만큼 이곳 생활이 힘겨워서 그런 말이 푸념 삼아 나왔을 게다. 아니면 정말 어느 날 미국에서 전화가 올지도 모르고. 그전에는 이 현장에 있는 한은 상극인 나와 부딪쳐야 한다. 그도 나도 고역이지만 태생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나는 그가 화요일에 이곳에 오지 않고 더 좋은 곳에 갔으면 싶다. 하여간 온다고 했으니 내일 모래 8월 17일이 기대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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