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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칼럼 > 최경주


건설 일용노동자로 오래 살아 왔습니다.
현재는 <건설연맹 서울건설지부>에서 조합원으로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온 형3 - 양씨 아저씨
 칼럼니스트  | 2010·04·18 07:49 | HIT : 2,723 | VOTE : 257 |
양중을 하다 사고 난 다음날, 베이징 형과 중국동포들이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고 작업을 중단하고 이틀째 재끼던 날 양씨 아저씨가 보따리를 싸서 현장을 그만둔다고 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다른 처지라도 우리만 일하고 말이야.”
그날 아침 양씨 아저씨가 보자마자 짧게 뱉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출근 사진을 찍으러 가는 중이었고 아저씨는 막 출근한 상태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두운 복도에서 아저씨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아저씨 말대로 한쪽에서는 돈 안나온다고 싸우는데 염치없이 일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이 싸움이 커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양씨 아저씨가 그만두겠다고 나간 것이다. 양씨 아저씨가 가방을 싸 현장을 나가다가 나와 마주쳤다. 양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그냥 가 버렸다. 짧게 깎은 뒷덜미에 밀가루를 뿌린 듯 흰머리가 보였다.
양씨 아저씨. 그는 이 현장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다.
현장에 온 며칠이 지나 세이크 닥트를 제작하는 지하 3층에 제작공장에 갔을 때,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두텁고 중후한 목소리가 언제 어디선가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는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특별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은근하게 고운 성량을 가진 저 목소리가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로 사람을 기억할 수가 있나? 얼굴은 생소했다. 이것저것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는 과정에서 묘하게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는 뇌에 들어와 기억 더미를 일깨워 나열시키더니 빠르게 아저씨의 목소리와 대비시켜 나갔다.
나이를 먹으니 눈보다 귀를 더 신뢰하는 버릇이 생겼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소리가 더 많은 것을 정보를 얻게 해주고 다양한 판단을 하게 해 준다. 멀리 작업자들 움직이는 소리나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으로 그쪽 상황을 보여준다. 현장에 많은 안전화 발소리중에 아는 사람의 발소리가 귀에 익을 때도 있었다. 또 흘려가는 이야기가 현장 내막을 짐작하게 해 줄 때도 있다. 하지만, 아주 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음색의 흔적이 낯익기는 처음이었다.
“아저씨 혹시 어디서 저와 함께 일하지 않았나요?”
현장에서 가장 많이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파란 포장을 쳐 놓은 한쪽 귀퉁이에서 칼질하는 나이 든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둥그런 눈을 한 바퀴 굴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처음 보는데요. 나는 많이 안 돌아다녀서.”
나는 눈을 깔고 그의 목소리를 세밀하게 음미해 보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의 끈이 어디선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혹시 청계천에 있는 삼일 빌딩에서 일하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어디선가 봤겠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더 깊숙한 곳을 더듬어 연관성을 유추해 보았다.
“어디 사세요?”
“예, 성남에 삽니다.”
나는 그 성남이란 말에 머릿속에 불이 켜지고 성남에 관한 말머리로 모든 인연의 기억을 추스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말미잘의 촉수처럼 건들거리는 수많은 기억의 끄트머리 중 하나를 잡아챘다.  
“삼풍백화점에서 일하셨죠?”
“아, 삼풍상회! 했죠. 그걸 어떡해? 아주 오래전인데.”
“90년대 초죠. 그때 방씨 형님이 책임자였고요?”
아, 몇 년 후 무너진 현장 그 그늘 아래서 우리는 함께 있었다.
“방씨, 그렇지. 방씨 엊그제 만났는데. 가끔 만나 술을 마셔요. 근데 어떻게 알았죠? 난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래 삼풍백화점이다. 수많은 목소리가 긴 터널 속에서 넝쿨의 잎처럼 여러 목소리와 고함들이 섞이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스물다섯인가 여섯이었고 아직 여자 손도 잡아 보지 못한 숫총각이었다. 지금은 아이가 셋이고 조만간 오십이다.
“양씨 아저씨는 지금도 잘 계세요?”
“양씨? 내가 양씬데.”
“아, 그러세요. 사실 저도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목소리가 기억나요. 맞아요. 아저씨가 양씨 아저씨였군요.”
아, 양씨. 바로 이 양반이 그때 그 양씨 아저씨였다.
“아무래도 난 기억이 안 나요.”
양씨 아저씨는 고래를 흔들고 신기한 듯 혀를 찼다. 옆 사람을 보고 자신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다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가 이 양씨 아저씨를 어찌 잊겠는가? 그때 거대한 그 현장 3층에서 아저씨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지금도 내 뇌리에 떠돌고 있는 화두로 살아 있는데.

내 닥트 생활에 딱 한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 양씨 아저씨가 그 사람이다. 일이 즐거워서 현장에 나온다는, 그래서 일하는 게 신난다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일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이 양씨를 떠올리곤 했었다. 지금은 무너지고 없는 삼풍백화점에서 일할 때였다. 우리 팀 열댓은 내기 일을 주지 않는다고 현장에서 막걸리를 사다 마시며 태업을 하고 있을 때, 양씨는 홀로이단 우마를 끌고 다니며 일을 했었다. 내가 함께 술을 마시자고 부르러 갔을 때 내 기억에 영원히 잊히지 않는 그 말을 나에게 했었다.
“나는 술 마시는 것보다 일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요. 개의치 말고 술들 자시세요.”
우마 아래서 가로로 열 댓이 바닥에 늘어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수직으로 세워진 이단우마에 아저씨는 홀로 일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양씨는 원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놔두라고 했다. 나는 이단 우마 아래서 발판에 위태롭게 서서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니 그가 더욱 높아 보이고 그가 한 말이 내 뇌에 뜨겁게 각인되고 있었다.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현장 노동자들을 만났지만, 그처럼 즐겁게 웃으며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근래 그 말이 내 입에서 가끔 나올 때마다 문득 그때 그 양씨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했었다.
언젠가 그때 일하다 싸우고 그만둔 삼풍백화점을 소재로 글을 써서 진보단체에서 하는 공모에 당선된 적이 있었다. 상금으로 컴퓨터 1대였는데 응모한 작품 수가 작아 수상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글을 작은책에 연재해준다고 해서 3회에 나뉘어 실렸다. 내가 쓴 글이 처음으로 활자화되는 순간이었다.
이젠 양씨 아저씨도 확연하게 늙어보였다. 무릎이 시원치 않아 걸음걸이도 관절염환자처럼 기우뚱 걸으며 가끔 무릎을 주물렀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셰이크 제작공장에서 제작만 한다고 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여러 사람을 물어보니 한 명씩 근황을 알려 주었다. 대부분 사람을 기억하는데 이름을 몰라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20년을 군도피한 아저씨는 이제 늙어 현장 일을 하지 않고 인천으로 이사가 자식들에게 의지해 살고 있다고 하고 방씨는 오야지로 근근이 일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양씨가 떠난 다음날 중국동포들이 이틀을 쉬고 현장에 나왔다. 전날 들리는 말로는 원청 사무실에 들어가 싸운다고 하더니 아침에 보니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베이징 형이 출근을 했다. 이틀 동안 파업을 한 효과가 있는지 설비에서 임금이 나왔다. 남한 사람인 우리는 얼마 되지 않아 다 나오기는 했지만, 중국동포들은 반만 나온다고 하여 종일 시끄러웠다. 임금을 받는 사장이 돈을 반만 주고 나머지를 다른 곳에 융통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반은 4월 말쯤에 준다고 하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도 마음 좋지 않았다. 다음 달에는 중국동포의 문제만 아니라 당장 우리도 엮이게 된다. 다음 달에는 돈을 받을 사람이 지금보다 두 배로 늘게 되는데 과연 제대로 지급이 될까 싶었다. 한 동포 아주머니는 작년치도 아직 못 받았다고 뒤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싸울 때 함께 해야 하는데 우리만 싸운다고 되나요?” 일을 하러 올라간 베이징 형이 내게 웃으며 한 말이다. 낯 뜨거운 말이다. 단 이틀이기는 했지만 본의 아니게 대체인력이 된 셈이다. 조합친구들이 이 말을 들으면 인생 헛 살았다고 손가락질 할 일이었다. 아마 하루쯤 더 싸웠더라면 나도 뭔가 판단을 했을 것이다. 변명이 되지는 않지만 소장을 중심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중뿔나게 나서기도 좀 그랬다. 양씨 아저씨의 판단이 부러울 뿐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됐지만, 다음 달에는 같이 싸울 거야. 돈이 제때 나오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말이야. 그때는 다 같은 처지가 되니 다 들고 일어나야지.”
베이징 형은 곧은 허리에 뒤짐을 쥐고 한 손에는 담배를 피우며 그래야지 하며 웃었다. 나도 점심 먹고 산 담배를 꺼내 한대 입에 무니 베이징 형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담배 피우기로 했어요?”
“예. 나이도 먹었으니 재밌는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잘했다며 불을 붙여 주었다. 흰 담배 종이가 타들어 가고 한 모금 빨자 불이 빨갛게 붙여지며 뜨거운 연기가 입안에 들어왔다. 연기를 뿜으며 3층으로 올라온 세이크 제작공장을 보니 양씨가 통을 가지고 나오며 나와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중국동포들이 나오니 양씨 아저씨도 출근하였다. 때려치우며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소장이 전화해서 다시 나오게 한 모양이다.
이미 은퇴할 시기가 된 양씨 아저씨는 그전처럼 일이 즐거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세월 탓이리라. 그때처럼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일을 한다면 그게 차라리 이상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때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양씨는 그 목소리는 그 말은 여전히 내 저 먼 기억 어딘가에 아직도 뚜렷이 박혀 있다. 뭔가 그럴듯한 경력이 쌓이는 재미도 아니고 돈 버는 재미도 아니고 내세울 작품을 만드는 재미도 아닌, 그저 일이 일 자체로 즐거운 그 어떤 노동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게 해준 말이 말이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고 있지만 노동의 즐거움은 자본의 착취와 사회적 멸시 계급과는 다른 세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또다른 개념이다. 마치 지저분한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감자나 오물속에서 자라는 호박같은 종류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노동의 숙련에서 오는, 혹은 질리도록 하다 어느 경지에 다다른 경계. 근래 노동의 즐거움 생각을 해 보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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